복음전도, 진짜 목적이 무엇인가?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포교활동과 친일-
1592년, 임진년, 당시 일본은 총병력 30여만명 가운데, 나고야에 예비대 10만명을 주둔시켜두고, 관백 토요토미 히데요시 직할의 호위병력 3만명을 남겨둔 채, 20만 병력을 동원하여 조선을 침공했다. 지원작전 병력 4만명을 제외한 실제 침공군 전투병력은 육군 15만 8천 7백명은 9개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선 침공군 1번대는 1만 8700명이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rk 주장(主將)을 맡았다. 1592년 4월 14일 오전 8시 경에, 고니시 유키나가의 1번대는 병선 700척에 나눠타고 오우라항(大浦項)을 출발하였다. 오후 5시 무렵에 부산포에 상륙하였다. 이내 동래성까지 함락시켰다.
이러는 사이에 침공군 2번대 2만 2800명은 주장(主將) 가토 기요마사의 지휘하에 나고야를 떠나 대마도에 도착하여 대기하였다. 1번대가 성공적으로 상륙하였다는 소식을 전달받고 19일에 대마도를 출발하여 부산에 상륙하여, 예정해둔 경상좌도 길로 북상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조선-일본의 7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침공군 1번대를 이끈 고니시는 독실한 천주교(로마 가톨릭) 신자였다. 군기(軍旗)조차도 붉은 바탕에 하얀 색 십자가를 그려넣은 깃발을 사용했다. 반면에 2번대 주장인 가토 기요마사는 독실한 불교도였고, 천주교도를 탄압했다. 해서, 가토 휘하에 있던 천주교도돌도 고니시 휘하에 들어와서, 고니시의 1번대는 가톨릭 교도들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아버지 고니시 류사(小西隆佐)는 국제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이었으며,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고니시는 본래 약재상을 하는 가문에 속했으나 우키다 가문에 발탁되어 무사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히데요시의 눈에 들어 중용되었다. 1584년에 천주교 영세(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누스'였다. 그 이듬 해에, 히데요시로부터 '쇼도'라는 섬을 영지로 하사받자 포르투갈 선교사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신부를 초빙하여 천주교 포교와 더불어 섬의 개발을 진행했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1593년 12월에, 부산포에 상륙하여 고니시 유키나가의 진중에 머물면서 왜군을 돌보는 군목활동을 하였고, 조선 민중에게 포교(전도)활동을 하고 각종 천주교 신앙문헌들을 전달했다고 한다. 당시에, 왜군에 투항하여 왜군의 조선침공에 협력하던 조선인들 가운데 천주교로 개종한 이들이 있었겠지만 아마도 이들은 왜군의 철수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이들은 고니시 유기나가의 몰락과 함께 몰아닥치 엄청난 박해 속에서 몰살을 당했을 것이 틀림없다. 반면에, 7년전쟁이 끝난 뒤에까지 조선 땅에 남아 천주교 신앙공동체를 이뤘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조선 즉, 한국에 서양 사상을 전파한 첫 번째 외국인이며 임진왜란의 참상을 서양에 소개한 중요한 증언자로서의 공로가 있다고 한국 천주교회 측에서는 주장할런지 모르겠지만, 잔혹한 학살을 자행한 침략군을 위해 군목활동을 하였다는 혐의로 인해 여전히 거부감이 크다.
그런데 세스페데스 신부가 고니시 유키나가의 진중에서 포교활동을 할 무렵에, 마테오 리치가 중국의 학예에 통달하면서 저 유명한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저술하였다. 이 책 천주실의가 실제로 출간된 것은 1603년에 북경에서 였다. 천주실의는 '예수회' 입장에서 작성한 로마 가톨릭의 교리학습서이다. 오늘날 개신교의 '조직신학 개론' 쯤 된다.
이벽, 이승훈, 권일신 등이 마태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중국에서 입수해 들여와, 지금의 경기도 광주 퇴촌면에 있는 천진암에 모여 일종의 학습회를 열었다. 조선의 유학자들이 불교 암자에 모여, 천주교 교리서인 천주실의를 독해했다. 천주실의를 통해 기독교의 전모를 나름대로 파악한 뒤에, 스스로 '세례'를 주고 '세례명'을 지었고, 스스로 '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열심히 포교하여 급속도로 교세를 늘렸다.
1786년경에는 신자가 1천명에 달하자, 천주실의에 있는 내용을 근거로 하여, 스스로 10명의 지도자(사제)를 선출하고 북경교구의 주교에게 보고했다. 북경에서는 깜짝 놀랬다. 조선에 공식적으로 선교를 한 적이 없었고 천주교에서 합법적으로 사제를 임명하여 "교회"를 성립시킨 적이 없으니, 천주교 교회법상으로는 '교회'라는 존재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조선 사람들이 천주실의 한 권을 읽고 스스로 교회를 조직해냈다. 기독교 교회사에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세계 가톨릭 교회사에 유래가 없이 한국 천주교회에는 정식 교회사 이전에 '가성직교단'(假聖職敎團) 혹은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의 시대가 있다.
지도자 광암 이벽(1754∼1785)의 저술 목록에 '성교요지'(聖敎要旨)라는 글이 포함되어 있다. 성교요지는 모두 49개 절로 구성되어 있고, 천지창조부터 최후심판까지의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이벽이 '성교요지'를 저술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고, 중국에서 활동한 미국 선교사 윌리엄 마틴(1827-1916)의 'Analytical Reader'라는 저술과 너무나 흡사하여 위작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당시 이러한 소식에 고무되어, 조선 전도(포교)에 지극한 관심을 기울인 것은 프랑스의 파리외방선교회였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조선 정부가 혹독한 박해를 가하여 무수한 순교자가 나오자, 파리외방선교회 소속 사제들은 파란 눈의 외국인이 조선 땅을 밟자마자 관헌들에게 붙잡혀 죽음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죽기 위해 조선 땅으로 가겠다며 앞다투어 나섰다. 파리외방선교회 본부에는 조선 땅에 가서 죽겠다는 순교자 대기명단이 마치 '오픈런'처럼 길었다고 한다.
스스로 기독교인이 된 조선인들이 정부의 박해를 기꺼이 감당하고 순교하는 모습에 감동하여 그 곁에서 함께 죽는 것이 사제의 본분이라는 자세였다. 실제로 신자가 관헌에 붙잡혀 가자, 양이 붙잡혀 죽음을 당할 처지인데 목자가 숨어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하면서 자진에서 관헌을 찾아가 죽음을 자처한 신부가 있을 정도였다.
조선 천주교의 자세한 정황은 파리외방선교회 소속의 다블뤼(Daveluy) 신부가 20여년에 걸쳐 조선선교에 관한 자료, 증언등을 수집하여, 1858년부터 1862년에 걸쳐 파리의 선교회 본부로 보냈고, 이 자료를 달레 신부가 다른 정보들을 보강하여 1874년에 '한국천주교회사'를 저술했던 것이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를 통해 계산해보면, 병인박해 기간(1866~1870)에 9명의 프랑스 신부들과 함께 8000명이 순교한 것으로 산정된다. 병인박해 이전에 있었던 3차례의 박해(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의 순교자들을 포함하면 1만 명 가량이 된다. 1784년에 처음 교회가 세워진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순교자가 1천명에 달했고, 1백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서 순교자의 수가 1만명에 달하게 된 것이다.
이런 특이함은 '조선'이 본래 예수회가 관장하던 중국(북경) 대교구 산하임에도 불구하고, 중국교구는 주로 포르투갈 출신 사제들이 부임하는 것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마치 독립된 교구처럼 간주되고, 프랑스 신부들이 주로 활동하는 교구처럼 되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어 쇄국정책이개항정책으로 전환되자 만주에 임시로 설치되어 있던, 조선교구 본부에서 두 명의 신부가 국경을 넘어 조선 땅에 숨어 들어왔다. 1877년에는 조선교구장 리델 주교가 잠입하여 포교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일본과 청나라의 간섭으로 뮈텔은 중국으로 추방되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1879년에는 뮈텔 신부와 레비 신부가 체포되었으나 지방관의 무지로 석방되었다. 서양인에 의한 전도활동이 사실상 허용된 것은 1886년에 프랑스와 체결된 '조불수호통조약'에서 였다. 1개월 가량의 실랑이 끝에 프랑스인이 개항장을 떠나 자유롭게 내륙을 여행하며 활동하는 것을 허용하게 된 것이다.
개신교 선교사 알렌이 난징호를 타고 중국 상해를 떠났고 9월 14일에 부산에, 9월 20일에 제물포에 도착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1885년 3월 31일 나가사키를 떠나 4월 2일에 부산, 4월 5일에 제물포에 도착했다. 이들은 즉각적으로 조선인들을 향한 선교활동을 개시하지 않았다. 서울에 주재한 외국인들의 예배공동체를 이끌면서 박해를 받을지의 여부를 파악하고 있었다.
1890년에, 뮈텔 신부가 제8대 조선교구장에 취임했다. 조선 천주교회가 시작된 역사와, 1만명에 가까운 순교와 프랑스 출신의 신부들의 헌신을 생각해보면, 개신교 선교의 역사는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본격적인 포교(선교)의 자유가 열렸을 때, 조선 천주교회의 교세가 폭발적으로 발전하여 조선사회의 개화와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힘은 충분했다.
뮈텔은 안중근을 살인자로 규정하고 천주교 신자 자격을 박탈했다. 3.1 만세운동 직후에 만세운동에 동조하는 신학생들에게 차라리 학교를 떠나라고 말했다. 뮈텔이 파리외방선교회에, 조선의 의병들은 "대부분 약탈자이거나 산적들이 틀림없다"고 보고 하기도 했다.
뮈텔의 이러한 태도는 프랑스의 대 조선정책과, 동남아 식민정책을 비롯하여, 영국 러시아 일본 프랑스 4개국 (제국주의) 협조체제 구축의 과정에서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화에 동의 혹은 허용하는 정책과 깊은 관계에 있다고 보아야한다.
1942년 1월, 명동성당 보좌신부 노기남이 본당신부를 거치지 않고 전격적으로 조선교구장에 임명되었다. 노기남의 친일행적은 개인적인 친일이 아니었다. 조선 천주교회 전체가 대단히 노골적인 친일교단이 되도록 만들었다.
뮈텔과 노기남의 친일행적을 '교회'와 '신도'들을 보호하기 위한, 지도자적 용단으로 변명할 수도 있지만 천주교회의 이러한 친일행적은,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이후에 오히려 천주교회의 교세가 급격히 쇠퇴하여 몰락에 가까울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을 바르게 인식하고 근본적으로 반성하고자 했다. 1974년에 원주 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으로 구속되자 젊은 신부들이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구성하여 반(反)-독재투쟁을 전개하는 민주운동가, 노동운동가를 보호하기 시작했다.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천주교회의 공식단체도 아니고 천주교회의 입장을 대변하지도 않았지만 민중은 마치 천주교회가 한국 민중의 편이고,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인 것처럼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부터 대략 한 세대 뒤에, 한국 개신교의 성장이 둔화되고, 전반적인 하향곡선으로 기울어져 쇠퇴를 걱정할 때, 한국 천주교회는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P.S.]
일제 하에서, 천주교회의 친일 문제를 잘 정리한 글들을 한국천주교 계열의 언론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가톨릭뉴스 지금 여기에'라는 곳에 실린 아래 글이 읽기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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