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교회 : 성경을 대하는 태도
좋은 교회를 다닌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확실하게 배워서, 몸에 충분히 익숙하게 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습관 가운데 하나는 "성경"을 대하는 태도다. 성경을 어떻게 대해야 하고,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말'과 '설교'와 '세미나'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회여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몸에 자연스럽게 익힌 태도에 깃들어 있다. 교회 구성원들이 조성한 분위기, 그 분위기가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고, 그 경외심에 따라 정말이지 '담대하게 말씀을 실천하는 자세'가 마치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차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격하게 비판하셨다. 회개하라고 촉구한 적이 정말 한 번도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이지 가차없이, 냉혹하게, 살벌하게 꾸짖으셨다. 바리새인들이 '문자'에 목숨을 건 탓에, 그 문자가 가리키는 '참 뜻'을 놓쳤고, 조상의 유전을 하나님보다 높인 탓에 오류를 바로 잡을 여지를 스스로 완벽하게 날려버렸다.
율법(구약성경)을 연구하는 '연구집단'인 바리새인들과, 율법(구약성경)을 필사하는 '서기관'은 엄격하게 말하자면 직능이 다르지만 현실적으로는 구별되지 않는 경우도가 많다. 바리새인은 바리새라는 '종교전통'에 속한 자라는 뜻이고, 이 전통과 관련을 맺게 된 이들이 '필사작업'을 위해 훈련된 이들이다. 필사작업은 특별하고 전문화된 스킬이 필요하기에, 서기관들 가운데 일부는 일종의 행정관료직으로 나가기도 한다.
기독교는 바리새파 특히, 서기관 전통에 정말이지 큰 빚을 지고 있다. 모세를 통해 '모세5경'을 받고, 사무엘을 통해 그 다음 성경들을 받는 등의 점진적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특별계시 즉 우리가 구약성경(39권)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보관/보존'하는 과업은 레위지파가 담당했다. 하지만 '기록된 성경'을 상실한 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어떤 종교든 경전을 '기록된 문헌'으로 갖추기 전에, 구술로 전승하는데, 종교의 근간인 '경전'은 일반 문헌과 달리 분문에 하자가 생기지 않는 방법으로 전승한다.
서유기에 등장하는 '삼장법사'(三藏法師)는 A.D. 7세기에 실존했던, 당나라 승려 현장을 가리킨다. 삼장(三藏, 트리피타카)은 경률론(經律論)을 가리키는 것으로 '불경'을 가리키는데, 불경 전체를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완벽하게 외운 승려를 삼장법사라로 한다. 불경을 결집해야 하거나, 중요한 문제를 다룰 때, 불경을 외우는 임무를 맡은 승려들이 모여 자신들이 외우고 있는 불경을 서로 맞춰보는 일부터 시작한다. 지금도 미얀만에서 일종의 국가고시로 '삼장법사' 시험을 치르고, 합격하여 '삼장법사' 칭호를 받은 사람은 국보급, 국가원수 못지 않은 예우를 받는다.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한 '에스라'와 레위인들에 의해 종교개혁/혁신이 이뤄지고, 에스라 전통이 발전하여 바리새 전통이 만들어진다. 레위인의 전통이 평신도 운동으로 발전하였다고나 할까? 바리새 전통의 뿌리인 에스라 개혁운동에서 근간은 율법을 연구하고 전승하고 교육시키는 것에 있었다. 전승에서 '필사/필경'의 전통이 나왔다.
필경사는 자기 스타일로 필사할 수가 없다. 한 글자 한 글자.. 필경하면서 한 줄을 쓴 뒤에는 반드시 원본과 사본의 글자수를 세었다. 한 줄을 쓸때마다 글자 수를 세고, 나중에는 세로 줄의 글자수도 세었다. 한 페이지의 필사작업을 마치면, 그 페이지의 전체 글자수를 세어, 원본의 글자수와 맞춰보았다. 그런데도 글자수에 3개 정도 오차가 생기면, 놓친 글자를 찾아서 써넣는 것이 아니다. 그 페이지 전체를 폐기했다.
그런데 필사 중에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절대로 소리내어 읽지를 않았다. (그것은 성경을 낭독할 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이름을 필사할 차례가 되면, 필사작업을 일단 중단하고, 깨끗한 물로 목욕재계를 하고 새 옷으로 갈아 입고, 돌아와, 새 펜을 가져다가 먹을 찍은 뒤에, 하나님의 이름을 쓰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쓰기 시작했으면 그 이름을 다 쓸 때까지 조금도 멈추면 안 된다. 눈을 딴 곳으로 돌려도 안 된다. 누가 불러도 응답하면 안 된다. 먹이 부족해서 펜을 들어 다시 먹을 찍어도 절대로 안 된다. 만일 어떤 경우든 펜을 멈추게 되거나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는 등의 사고가 생기면 그 페이지 전체를 폐기해야 한다.
A.D. 10세기 경에 만들어진 맛소라 사본은 그렇게 전승된 구약성경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본이 중요한 까닭은 맛소라 학자들이 '모음 부호'를 만들어서 본문에 표기를 했기 때문에 '랍비' 교육을 받지 않아도, 기독교인들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외주를 잘 달아놔서 대단히 유익한 본문이다.
맛소라 사본은 구약성경에 있어서 부동의 권위를 갖는다. 그러다가 1947년에 우연히 사해 인근 쿰란이라는 곳에서 '사해사본'이 발견되었다. 이 발굴작업은 1956년까지 이뤄졌는데, 이 사본들은 B.C2세기~A.D.1세기 사이에 기록된 것들로서 일단의 학자들은 맛소라 사본의 독보적 지위를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오히려 맛소라 사본의 정확성을 돋보이게 해줬다. 1천년의 시차가 무색하게 본문은 거의 완벽하게 일치했다. 오늘날에도 구약본문은 맛소라 사본 본문을 사용한다.
바리새전통-서기관전통-랍비전통은 '성경 본문'을 존중한다는 점에서는 완벽하게 일치한다. 이들은 A.D.99년에 얌니야에 모여서 유대교 정경을 지금 우리가 구약성경(39권)으로 이해하는 그대로 확정했다. 그러나 이 의미는 그 전까지는 유대교 정경이 정해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과 사도들의 활동으로 "신약성경"이 대두되었고 '기독교인들'이 왕성하게 활동한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손으로 죽인 '예수'와 그 추종들을 유대교인으로 인정할 수는 없었고 그들이 애독하는 복음서와 신약서신들을 인정할 없었기에, 이 무리를 배제하기 위해, 배제하는 수단으로, "히브리어 원본으로 작성된 것만을 정경(성경)'으로 인정하기로 했던 것이다. 이 기준 하나만으로도 모든 기독교인들을 유대교 밖으로 추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는 구약에 관련해서는 이 기준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던 것은, 이 기준이 신박해서가 아니다.
구약성경은 12개의 소선지서 특히, 말라기로 끝난다. B.C 5세기 무렵부터 예수님의 강림 때까지 소위 '신구약중간시대' 400년 동안에는 특별계시가 없었다. 이때 회당예배 때에 강독하는 책들은 여늬 종교문헌, 기록물들과는 완벽하게 다른 권위를 갖는다.
신약성경의 정경화도 마찬가지였다. 말시온이 등장해서 구약성경들 그리고 '야고보'서와 같이 행위를 강조하는 책들은 성경으로 인정할 수 없고 읽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도전에 직면하여 교회는 사도들의 권위가 더 희미해지기 전에 "정경"을 확정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기독교 정경은, 당시 지도자들이 쓸만한 내용을 담은 책이라고, 교회라는 공동체를 단단하게 만들어줄 '구심력을 발휘할' 책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선정한 것이 아니다.
사도들의 전통이 확실한 교회가 사도적 기원이 확실한 것, 공식적으로 및 예배 중에, 그리고 교리논쟁에서 사용해온 책들만을 남겨두고 가급적이면 배제하는 방식으로 선정했다. 그리고 선정된 성경목록을 여러 종교회의에서 교차적으로 검증하고, 옛부터 교회가 예배 중에 지속적으로 사용한 책인지를 확인하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교회가 정경을 선정한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정경' 즉 하나님의 말씀 위에서 교회가 시작되었고, 성숙한 교회는 자신을 낳은 정경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복음서만 잘 읽어보아도, 예수께서 제자들을 모아서 교회를 세우고 말씀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말씀을 선포하시고, 말씀을 따르는 이들을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신 이들을,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뒤에 '모아' 교회를 이루게 하신 것이다. 말씀이 성도를 (거듭/다시) 낳았고, 교회를 낳았다.
말씀, 그 말씀을 기록한 성경(정경)은 이처럼 말씀을 경외하는 이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고 전승하여 역사를 이뤘다. 저주 중에 가장 무서운 저주, 하나님의 분노는 말씀을 가벼이 여기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말씀이 사라지면, 말씀의 능력이 사라지면, 혼돈과 파멸 밖에는 남는 것이 없다. 말씀을 경외하는 태도는 축복된 삶의 시작이다.
주석책을 많이 읽어 설교 준비를 하는 목사들이라고 해서 말씀을 제대로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 주일성수를 목숨을 걸고 엄수한다고 해서, 십일조를 철저히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는, 참으로 경외한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말로 설명할 수 있고, 말씀을 진실로 경외해야 한다는 것에 진심으로 동의한다고 해서, 그러한 태도가 몸에 배는 것이 아니다. 상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함께 하면서 느낌으로 피부의 땀구멍으로 슬며시 스며들 듯이 배우는 것이다. 그런 교회가 그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