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20]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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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절기를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절기라는 것은 1년을 주기로 한 '계절의 변화'를 미리 정확하게 파악하여 농사를 잘 짓도록 하는 데에 필요했다. 즉, 절기라는 것은 1년을 단위로 하여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쉽게 기억하고 삶을 영위하기 위한 것이다. 고유한 문화 및 종교를 가진 민족은 그 절기에, 이와 같은 삶의 방식에 '종교적 의미'를 덧붙여서 삶과 종교를 일치시켰다.
그러므로 절기를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삶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 삶과 종교가 더 이상 일치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기독교가 공인되기 이전에는, 교회의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절기와 삶의 주기로서의 절기가 일치되지도 않았고 일치시킬 필요도 없었다. 로마인들이라고 하지만 본래의 로마민족이라는 것도 지중해 주변에 세워졌던 알렉산더의 유산을 흡수한 뒤의 로마제국에서는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각 지역의 민족마다 자기 관습에 따라, 자기 필요에 따라 절기를 지키면 되었다. 팔레스틴의 유대인은 유대인들의 절기를 지켰다.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절기산정 방식을 일치시키면 되었다. 기독교에서 중요한 것은 일차적으로 부활적이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날짜와 부활하신 날짜는 부정할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는 날짜다. 예수께서 죽으신 그 날과 부활의 날은 어떤 절기와도 겹치지 않았다.
춘분, 하지, 추분, 동지, 이 네 개의 절기는 지구 상에 존재하는 어떤 민족도, 어떤 역법을 사용해도 바뀌지 않는 기본적인 절기이다. 이 네 절기 가운데 한 절기를 새로운 1년이 시작되는 날 즉, 1월 1일로 삼아 달력을 만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기준을 잡고,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준수하도록 만드는 힘을 누가 갖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정복하고 파괴하고 약탈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대와 탁월한 전술과 전쟁기량을 갖추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제대로 된 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즉, 제국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도량형"과 "화폐"와 "역법"(즉, 달력)을 정확하게 측정하고 엄격하게 준수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학문 특히 실용적 과학'을 주도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힘,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을 합리적으로 유지하고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갖춰야 한다. 동양에서 그러한 의미에서 최초의 제국은 진나라였고, 시황제였다. 서양에서는 로마제국이었다. 물론, 이집트 제국과 바벨론-페르시아 제국이 그러한 제국이었다.
로마제국의 위대한 점은 그 지배영역의 방대함에 있지 않다. 지중해를 제패했다는 사실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 판도에 들어오는 수많은 민족들과 지방들이 통일된 도량형을 사용하고, 안정된 화폐를 사용하고, 정확한 달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함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로마제국이 금화의 액면가와 순금의 함량이 정확할 때는 강성했다. 하지만 액면가를 그대로 놔두면서도 순금의 함량을 줄이는 편법을 사용하면서 국력이 쇠퇴해지고, 쇠퇴해지는 만큼 제국의 치안과 질서는 무너져갔다.
도량형과 천문역법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천문을 관측하고 정밀한 '역법'을 확립하여 달력을 만드는 능력이 문화를 지배한다. 조선시대 세종대왕과 장영실의 중요성이 이 부분에 있다. 천문현상을 해석하고 정확한 절기를 산정하고 달력을 만드는 것은 "제왕의 학문"으로서, 중국 즉, 당시의 명나라 황제의 권력이었다. 명나라에서 황제의 이름으로 건네준 '정보'를 기준으로 날짜를 산정하고 거기에 맞춰 살았다.
시간을 정확하게 산정하고 시간을 규정하는 것은 시간을 지배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성한 권력이다. 그래서 중국의 황제를 천자(天子)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세종 때에 당시 중국의 천문역법과 아라비아 역법에 관련된 모든 정보를 수합하여 "칠정산"이라는 역법을 완성했다. 천문을 관측하고 정확한 시간을 계산하기 위한 해시계, 물시계 등을 만들었다. 세종은 조선 천문학을 완성하여, 독자적으로 달력을 만드는 나라를 꿈꿨다. 그것은 문화, 학문, 과학의 위상을 황제국에 버금가도록 만들겠다는 것인 동시에, 이 나라, 이 땅에 정확하게 맞는 절기와 시간을 독자적으로 산정하는 진정한 자주국가를 만들겠다는 소망이었다.
A.D.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삼위일체 교리를 안정화하는 단계로 진일보한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부활절 절기를 계산하는 방법을 확정하는 것이다.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부활절 날짜를 산정하는 방법을 통일하였기 때문에 교회는 11세기 초까지 "하나"의 보편교회(One Universal Church)로, 즉 오늘날 매주 예배시간에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공회'로 번역되는 'The Catholic Church'로 존속할 수 있었다. 11세기 초에 그리스 문명권의 '동방교회'와 라틴문명권의 '서방교회'로 나눠진다.
이 분열의 배경에는, 서 로마제국에 밀고 들어와 제국을 뒤엎은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있었다. 게르만 족이 로마제국의 서부 전역에 들어와 일체의 문명 즉, 로마제국의 문화적 유산을 모조리 파괴하였던 것이다. 이들을 개화시키고, 복음화시키고, 삶의 질을 개선하고 나라다운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이끈 것은 교회였다.
미개한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다. 그 가운데 삶에 깊이 관여하는 것이 교회의 절기였다. 교회측에서는 복음의 요지를 잘 익히도록 절기를 편제하였지만 농사를 짓는 데 적합한 절기와, 게르만 토착문화와, 기독교 절기가 자연스럽고 적절하게 융합되었다. 기독교 교회의 절기는 아무리 늘려봐야 셋을 넘기지 못한다. 부활절, 성탄절, 오순절이 그렇다. 이 중 중요한 것이 부활절과 성탄절이다.
부활절 절기는 명백하고 정확하게 정해져 있다. 영웅 혹은 위인은 자기가 수태된 날에 죽는다는 속설을 끌어다 놓고보니, 부활절로부터 대략 9개월 뒤에, 동짓날이 온다. 태양력을 한층 정밀하게 교정해놓고 보니, 그 날이 (오늘날 기준으로) 언제나 12월 25일이다. 예수께서 태어나신 그 날부터 태양의 길이, 낮의 길이가 길어지기 시작하니, 기념하기 딱 좋은 방식이다.
지금은, 각자 여러가지 방법으로 날짜와 시간을 정확히 안다. 시간을 알기 위해서라면 시계는 더이상 귀중품이 아니다. 핸드폰이든 자동차 네비게이션이든 정밀한 시계와 표준시라는 기준이 없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간이 작동한다. 그러나 시계가 희귀한 시절, 혹은 시계가 유명하고 부유한 도시인 경우에 중앙 광정의 시계탑이 거의 유일한 시절에는, 일반인들의 경우 교회가 시간과 절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니 절기에 맞춰 사제의 복장 색깔이 달라지고, 예배를 시작할 때 사회자가 '사순절 몇 째 주일' 혹은 '대림절 몇 째 주'라고 선언하는 말은 시절을 확인하는 가장 정확한 기회였다. 물론, 한국에서는 예배 사회자의 그런 선언이 절기를 아는 수단이 아니었다. 한국 사회는 농사절기를 확인하는 별도의 달력을 사용해왔기 때문이다. 지금도 인터넷을 통해 어렵지 않게 우리나라 각 지방에 알맞게 정리된 '농사달력'을 구할 수 있다.
기독교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명확하게 되새기기 위한 것인데, 신자 개인이 자신의 성경을 가질 수 없던 시절에는 절기 준수가 더없이 중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모든 사람이 활자로든 스마트폰 앱이든 성경을 읽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다. 온갖 자료를 구할 수 있다. 작은 애정만 있다면 고대인들이 평생을 추구해도 구하지 못할 만큼의 방대한 자료를 구할 수 있다. 매일 묵상할 수도 있다. 이런 시대에 절기를 정해놓고 복음의 어떤 부분을 주기적으로 "기념"하는 행사가 필요할까?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필요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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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먹구름이 온 세상을 덮는다
1990년 8월 2일 새벽 2시, 정규군이 대략 65만, 총병력은 1백만을 상회하는 이라크는 총병력 3만명이 채 안 되는 쿠웨이트를 전면적으로 침공했다. 이 침공작전을 위해 이라크는 쿠웨이트와의 국경지배에 약 40만에 달하는 정예부대를 배치해 두었고, 그 가운데 10만명을 약간 상회하는 병력을 동원하여 쿠웨이트를 강습했다.
실전경험이 풍부하고 강력한 무장과, 공중강습 부대를 동원하여 공항을 비롯하여 각종 주요 시설을 순식간에 점령했다. 이라크 특수부대가 개전과 동시에 쿠웨이트 국왕을 생포하기 위해 전격적으로 강습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놀랍게도 왕궁수비대가 선전하여 이라크 특수부대를 격퇴했다. 오전 5시에, 이번에는 이라크 해군 소속의 상륙강습부대가 왕궁을 공격해왔으나, 왕국수비대가 이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그러나 수도 쿠웨이트 시티를 점령한 이라크 육군 전차부대가 가담한 세 번째 공세는 감당하지 못했다. 쿠웨이트 왕궁 수비대는 무너졌고, 최고 지휘관은 전사했다. 그러나 왕궁수비대의 작전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이라크 특수부대의 공격으로부터 왕궁 수비 전투를 끝까지 지휘했던 것은, 쿠웨이트 군 최고사령관이자 국왕의 동생 즉, 왕제(王弟)였던, 셰이크 파우드 알 아마드 알 사바였다. 왕제는 쿠웨이트 국왕부부와 나머지 왕족들이 사우디아라비아로 탈출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끝까지 항전했고 결국, 전사했다.
이라크는 1990년 8월 5일에, 쿠웨이트를 합병한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라크가 완벽한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었다. 쿠웨이트 왕제와 수비대가 결사적으로 항전하면서 시간을 벌어준 덕택에, 쿠웨이트 국왕 부부와 왕족들이 사우디아라비아로 탈출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쿠웨이트 왕국의 주인인 국왕 부부와 왕족들이 사우디에서 망명정부를 구성하고, 소수의 인원이나마 다국적군에 합류하여 국토회복을 위한 전쟁을 계속해서 치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제1차 걸프전쟁이라고 부르는 전쟁은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전면적으로 침공한 8월 2일자로 시작되지만 이 전쟁이 쿠웨이트를 이라크로부터 해방하고 다시금 독립국 지위로 돌려놓는데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쿠웨이트의 주권자가 이라크에 항복하지도 국권을 넘겨주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빼앗긴 것은 되찾을 수도 되찾아 줄수도 있지만 넘겨준 것은 되찾지 못한다.
쿠웨이트 국토를 국왕에게 회복시켜주고, 쿠웨이트 국민들을 식민지적 수탈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기 위한 다국적군의 대(對) 이라크 전쟁은 크게는 2단계 군사작전으로 구성되었다. 1단계는 이라크 군으로부터 사우디아라비를 지키는 사막의 방패 작전이고, 2단계는 다국적군이 쿠웨이트를 해방하기 위한 공세작전으로서, 쿠웨이트 방면에 배치된 이라크군을 격퇴하는 것이 목표다.
사막의 방패 작전은 기록상으로는 이라크 군이 쿠웨이트를 침공한 1990년 8월 2일자로 시작되었지만 이것은 작전을 수행하는 연합군이 정한 날짜가 아니다. 연합군이 정한 날짜는 1991년 1월 16일이다. 그 다음날인 1월 17일부터, 제2단계 작전인 사막의 폭풍 작전이 시작된다.
사막의 방패 작전은 명목은 이라크의 침공이 사우디 아라비아로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면서 미군의 기지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는, 영국과 프랑스 등이 군대를 파견하여 연합군을 구성하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다.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를 물리치기 위해, 구성한 연합군에 군대를 보낸 나라가 30개를 넘는다. 가장 많은 병력을 참가시킨 나라는 미국이다. 67만명을 동원했다. 가장 적은 병력을 보낸 나라는 헝가리와 노르웨이이며, 각 50명 씩을 보냈다.
총병력이 거의 1백만에 가까웠다. 이 병력을 미군 중심으로 몇 개의 사령부로 나눴다. 육군중앙사령부, 해병대중앙사령부, 통합군 동부사령부, 통합군 북부사령부로 나눴다. 사막의 폭풍 작전이 시작되고, 본격적인 군사작전이 개시된지 100시간 만에 이라크 군은 괴멸되었고 미국 대통령은 군사작전의 종료를 선언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 본토에서 일어난 테러사건으로 촉발된 긴장상황은 2003년 3월 20일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이 이라크를 침공했다. 이것이 제2차 걸프전쟁 혹은 이라크 전쟁이라는 이름의 전쟁이다.
2003년 이라크 침공작전에 동원된 연합군 총병력은 약 31만명이고, 그 가운데 미군이 19만 2천명이었다. 당시 미 육군참모총장 에릭 신세키는 이라크 침공작전은 최소한 40만명의 병력이 필요하고, 평정 및 안정화 작전을 무사히 종료하기까지는 10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이유로, 따라서 미군은 이를 감당할 수 없다고 반대의견을 피력했다. 하지만 당시 국방장관은 에릭 신세키의 의견은 틀렸다면서 작전을 밀어부쳤다. 그러나 세월은 에릭 신세키의 판단이 정확했었다고 증명해주었다.
왜 여기에서 1990년~1991년의 제1차 걸프전쟁, 2003년의 제2차 걸프전쟁을 복기하는가? 베트남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고 물러나자 미국이 프랑스를 뒤이어 베트남 문제에 개입할 때까지만 해도, 미국이라는 제국은 거침없이 패권을 확대하면서 자유주의 세계를 방어하기 위한 어떤 전쟁도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미국에 맞섰던 쏘련이 멸망하듯 해체되고, 중공이 미국과 국교를 수교하고, 미국과 전면적으로 전쟁을 벌였던 베트남도 미국과 수교를 하는 등, 미국의 패권은 계속해서 확대되었다.
하지만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그 실상이 겉보기와는 너무 달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미국이 주도한 전쟁에서 미국이 제대로 이긴 전쟁이 없다. 한국의 주류 언론은 한반도 주변에 미 해군 항공모함이 다가오기만해도 호들갑을 떨고, 괌에서 B-52 폭격기가 출격하여 한반도 남단이나 제주해협만 통과해도 '김정은이 떤다'라든가 '지하벙커에 숨어 든다'는 식의 기발한 제목을 뽑곤한다.
미 해군의 핵추진 항공모함에 탑재된 항공력은 작은 나라의 공군력 전체에 맞먹는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지만 해공군력만으로는 전쟁을 시작할 수는 있지만 제대로 이길 수도 없고 마무리할 수도 없다. 2003년에 미 육군 참모총장은 이라크를 점령하고 안정화를 하는데에는 40만명의 병력이 필요하고 10년이 걸린다고 했다. 국방장관은 그 절반의 병력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했지만 동맹국들로부터 10만명의 병력을 지원받았고, 안정화 작업은 실패했다.
러시아 군대가 "특수목적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우크라이나 동부의 러시아계 주민 보호를 구실로, 전면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지만, 미국은 물론 어떤 나라도 우크라이나에 "병력"을 직접 지원하지 못하고 있다. 명목상 이유는, 우크라이나가 나토 가입국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핑계다.
1991년에, 우크라이나가 구 쏘련이 해체되면서 독립하게 되었을 당시에, 핵탄두 약 1,700기와 ICBM 170기를 보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이 핵무기를 관리할 능력도 재원도 없었다. 그래서 1994년에, 미국과 영국과 러시아와 더불어 "부다페스트 각서"를 작성하고 협정을 체결하였는데, 이들 3국은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신에, 경제개발 자금을 지원하고 영토보전을 약속하였다.
따라서 부다페스트 협정의 한 당사국인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도 분노할 일이지만, 영토보전을 약속한 미국과 영국이 우크라이나 영토보전을 적극적으로 책임지지 않는 것 역시 분노할 일이다. 하지만 분노의 감정을 표출하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 미국과 서방국가들이다.
서유럽 안보의 중요한 축인 독일은 상비군 총병력이 18만 4천명이며 이 가운데 육군이 7만명이고, 실제 전투병력은 약 5만명 정도이다. 1개 신속전개 사단과, 2개 기갑사단이 주축이다. 보유하고 있는 주력전차는 3백 대를 넘지 못한다.
우크라이나의 영토보전을 약속한 또 하나의 나라인 영국 역시 우크라이나에 파병할 전투병력이 없을 것이다. 영국 육군에는 2개 이상의 사단들을 묶고, 5만명으로 구성된 전략단위 즉, 군단이 존재하지 않는다. 영국의 각 지역에 모두 4개의 보병사단이 있고, 총참모장 직속의 야전사령부에는 2개의 사단이 유사시에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구성되어 있지만 우크라이나에 파병하여 전투를 수행하도록 하기에는 국력에도 벅찰 것이다.
미 육군 역시 유사시에 2개 사단을 즉각 동원할 수 있도록 편제할 수 있지만 우크라이에 전쟁에 병력을 투여하기엔 여러가지로 문제가 많다. 진짜 문제는, 즉 미국이 당면한 난감한 상황이란 미국이 전세계 어디든지 병력을 보내 본격적으로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준비된 전투병력이 육군 2개 사단 뿐이라는 사실이다.
미국 해병대 지상군은 3개 사단으로 편제되어 있지만 제1사단만이 3개연대로 완편되어 있고, 제2사단과 제3사단은 편제가 불완전하여, 동원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굳이 해병대 지상군을 동원한다면 해병대 제1사단이 최선일 것이다.
만일 지구의 반대편에 위치한 2곳에서 동시에 전쟁이 벌어지더라도 모두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던 미국이 지금은, 만일 그럴 경우 어느 한 곳에서만이라도 이길 길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쪽으로 무게추가 기울었다.
그러므로 지금 미국이나 유럽 주요국가들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직접 참가하여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수 없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선에 뛰어들어 러시아와의 전쟁에 발목이 잡히면, 다른 곳에서는 속수무책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중동이 위태롭고, 대만이 위태롭고, 다오위다오가 위태롭고, 한반도가 위태롭다. 푸틴이 바보가 아니고 시진핑도 바보가 아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만 1년을 넘기면서 미국과 유럽의 탄약이 고갈되고 있다. 위기를 느낀 사우디아라비아는 중국의 중재를 받아들여 철전지 원수인 이란과 화해를 하였다. 사우디가 중국과 손을 잡고 미국을 배신하는 행보를 보인 셈이다. 중국 정규군인 해방군 동부전구사령부는 실탄을 장전한 채 대만포위 훈련을 진행 중이다. 중국 시진핑 입장에서 보면, 대만을 점령하고 중국 통일을 추구한다면 어쩌면 지금보다 더 좋은 때가 다시 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만도 하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전 지구적 패권경쟁을 가속화하고 있다. 문화와 경제라는 측면에서, "관세장벽"이나 "화폐전쟁"이라는 폼나는 이름으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화약이 곳곳에서 터지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쟁의 먹구름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 세력구조를 재편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이 얼마나 지속되고, 어떤 결과로 끝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미국 역시 여러가지로 몹시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시절이 이런 데도 우리나라의 기득권층, 나라를 이끌고 보호하고 발전을 도모해야할 책임자들, 그리고 그들이 속한 계층은 도대체 아무런 생각도 구상도 없는 모습이다. 20세기 세계질서에서 21세기적 질서로 재편되면서 1등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한 어떤 전략도 확인할 수가 없다.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닥친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일상이 위기이고, 준비된 사람에게는 모든 위기상황을 기회로 삼을 수 있다. 강자에게 의지하는 약자는 결국 강자에게 먹힐 뿐이다. 위기상황이란, 철저히 준비되고 지혜로운 약자에게는 강자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18세기~19세기 말까지, 즉 조선의 말기에는 우리는 전혀 준비되지 못했다. 영정조 시대에 황금같은 기회를 놓쳤고, 시간을 벌어보자는 흥선대원군의 시도도 실패하여 우리 민족은 아무런 대응책도 없이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강대국의 호의를 기대하면서 갈팡질팡하다가 매국노들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이 시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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