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에 함몰된 교회
한국교회의 실상을 '자본주의적 속성'이라고 진단한 글을 아주 오래 전에 읽은 기억이 있다. 그 글을 단 한 번 읽었고,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은 매우 흐릿해졌지만 그 요점만은 뚜렷하게 기억된다. 그 논지가 이토록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 글을 읽었을 때 어떤 강렬함을 느껴서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그 글을 읽었을 때는 새로운 시각에 눈을 뜨게 되었다는 놀라움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 기사가 실린 매체의 뒷배 역할을 하는 대형교회야 말로 '자본주의'에 철저히 함몰된, 그야말로 '자본주의의 화신'이라고 불려도 전혀 손색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마치 개미가 개미지옥이라는 구덩이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자본주의라는 구덩이에 빠졌는데, 이 구덩이에는 엄청난 자기 착각을 야기하는 물질로 도배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자본주의'를 '공산주의'에 대조시켜, '재산의 사유화'가 그 본질인 것처럼 선전하는 경우가 있다. '사유재산제도'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구분하는 기준점이라는 것도 충분히 합리적인 기준이 아니지만, 우리나라가 자본주의를 취하고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데, 자본주의 그 자체, 그리고 우리나라가 운용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를 그 자체로 이해하고 교정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가 아닌 체제라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본질을 알 수가 없다.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우리나라의 현실을 이해하고자 하면 우리가 겪고 있는 체제적 모순을 보고, 그 모순의 톱니바퀴에 갈려나가고 찢겨나가는 약한 자들의 처지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교회의 목회자들 대부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교회를 구성하는, 그리고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많은 신자들이 부유한 지배층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약자들이다. 게다가 자본주의의 무서운 점은, 국가 경제정책의 향배에 따라 수많은 대중들이 '약자' 그룹으로 아주 손쉽게 굴러 떨어지기 때문이다.
IMF를 겪으면서 중산층에 속해 있던, 선량한 시민들의 상당수가 나락으로 굴러떨어졌고, 약자 계층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직 IMF를 충분히 극복하지 못한 상태임에도 다시금, 코로나-19 팬데믹과 세계적 경기침체, 그리고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여파로 이번에는 자영업자가 몰락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대 남자들은 기성세대 전체에 대한 분노를 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우리나라의 경제정책 철학을 재정립하고, 국가-사회의 경제시스템을 개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운용해온 경제시스템과, 우리가 살고싶은 세상을 만들어낼 경제시스템에 대해 많은 논의를 하고, 연구하고,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돈'을 인격화할 수 있는 제도이며 '돈'이 생명체로 간주되는 문화에 있다. 그래서 '돈'이 돈을 벌고, 돈이 착한 일도 하고 나쁜 일도 한다. 그리고 사람을 고용하기도 하고 해고하기도 한다. 자본주의란 이런 개념을 실제로 성립시키고 작동시키고, 보호하기 위한 정교한 법률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돈'을 왕처럼, 신(神)처럼 떠받들며,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은 특별한 '위세'를 부린다. 한국교계에서, 큰 어른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 위상을 구축했는지를 보라. 영성, 영향력, 설교기량 등은 모두 허울 뿐이다.
자본주의 원리를 교회의 내적 원리의 일부로 간직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바로 한국교회에 개신교회를 전달해준 첫 세대의 선교사들, 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제물포(인천)에 발을 디딘 것이 1885년 4월이다. 그런데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정세는 그로부터 불과 10년 뒤인 청일전쟁(1894-1895)을 전후로 하여 격동하게 되었고, 1905년 카쓰라-테프트 밀약으로 인해 한반도가 일제의 식민지로 강제 병합되는 것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 격랑을 몰고온 태풍은 다름 아닌 19세기 열강의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낳은 모순이라는 태풍이었다.
게다가 언더우드를 중심으로 한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의 '재정정책'을 자본주의 철학을 반영하여 수립했다. 그 명칭은 '삼자원리'(三自原理, ‘three-self principles)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고, 제안자의 이름을 따라 '네비우스 선교정책'이라고도 불린다.
삼자를 '자립'(self-supporting), '자전'(self-propagating), '자치'(self-governing)라는 세 개의 개념어로 정립하고 분석할 수 있지만 이 삼자를 관통하는 원리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내 돈은 내 돈이고, 네 돈이 네 돈이다'라는 것이다. 결국, 돈이 많은 교회가 부자교회이고 좋은 교회이며 부자교회가 돈을 잘 쓰는 것은 그 교회가 자기 돈을 쓰는 것이니 뭐라고 하지 말라. 가난한 교회는 돈이 없는 못난 교회이니 부자교회가 부러우면 '알아서 부흥해라'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부자교회 옆에서 초라해지는 가난한 교회는 못난 교회이고, 대형교회 옆에서 신자를 빼앗기며 쪼그라드는 작은 교회, 상가교회는 어느날 없어져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더이상 한 것, 실제로는 부끄럽고 기괴한 '미자립교회'라는 용어가 존재하고 정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용어는 '복음'과 '은혜'가 외침 속에는 존재하더라도 실제적으로 작동하는 힘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돈'은 본질상 '이기주의적'이다. 이기주의가 강력해지면 '돈'은 '독'이 된다. 돈독이 오른다는 말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쌓아놓아도, 아무리 많이 만져도 '독'이 오르지 않고 중독되지 않는 돈은 좋은 돈이다. 기독교인의 관념에 맞춰 용어를 정리한다면, "거룩한 돈"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평생토록 율법을 엄수했다고 자부하는, 자신을 찾아온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께서는 '네게 오히려 부족한 것이 하나 있으니,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 등장하는 문맥에는,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다는 주님의 말씀이 있다. 그런데 이 경구보다 '그 청년이 부자였기에 재산이 아까워 주님의 말씀대로 하지 못했다'는 취지의 말씀에 나는 더 많은 생각을 기울이곤 한다. 진짜, 이 청년에 대해 궁금한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의 숨은 뜻을 알았을까 하는 궁금증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뒤집어 보면 즉, 이면에 숨은 뜻은 정말이지 무서운 내용이다. 네가 어려서부터 아무리 완벽하게 율법을 준수했더라도, 어떤 사람도 네게서 흠을 잡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너는 천국가지 못한다는 의미가 숨어있다. 이것은 마치 "예수를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간다!"라고 확신하고 있는 사람에게 예수께서 다가와서는 "너는 내 말대로 하지 않는데, 어떻게 천국에 갈 생각을 하는가? 너는 천국가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신 셈이다.
다시 말해보자, 부자교회가 예수님을 찾아와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축복하시어, 이렇게 큰 예배당과 저렇게 큰 기도원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을 위해 우리가 아직 해야할 무엇인가가 있습니까?'라고 말한다면, 주님께서는 '아직,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교회에게 주라! 그리고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한국교회는 열심히 헌금해서, 자기 예배당을 짓고, 자기들끼리 돈쓰고, 자기들끼리 먹는다. 부익부 빈익빈이 자본주의의 병폐다. 단순한 모순이 아니다. 질병이다. 세균에 의해 오염되고 부패라는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위생과 청결, 예방과 처치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방치한 결과라고 봐야 한다. 이 질병을 잘 고친 나라들이 '복지국가'이다. 병을 잘 예방하고 잘 고쳤기 때문에 건강하게 잘 산다. 그런 나라를 만들었다.
교회는 헌금이 있고 재정을 관리하고 예산을 기획하고 집행한다. 그 규모와는 상관없이 '경제 시스템'이 구축되게 되어 있고 작동하기 마련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잊지 말고, 외면하지 말고, 철저하게 집행하면 된다. 그러면 신자가 신자다워지고 교회가 교회다워진다. 교회가 교회다워진다는 것은 도덕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교회재정의 수입과 지출이 복음에 합당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철저히 실천하는 것이 되면, 잘못된, 병든 자본주의는 치유된다. 성경적-건강한 자본주의의 모델이 교회 안에서 자라나올 수 있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