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믿음을 믿지 않는 것이 참 믿음이다
성경은 구하는 이가 구하고 찾는 이가 찾는다고 가르친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 하는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라고 가르친다.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가 당당하게 구하는 것을 '감히, 무례하다!'라고 꾸짖는 그런 종교가 아니다. 얼마나 좋은 종교인가? 기독교가 이처럼 좋은 종교인 까닭은 기독교인들이 신봉하는 하나님이 참된, 진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은 예수님을 '빛'이며 '생명'이며 '진리'이며 '길'라고 증언한다. 세상에 빛이 많지만 온갖 한계와 결점이 있는, 원인과 결과 그리고 부작용을 안고 있는 빛과 다르기에 '참 빛'이시다. 모든 참된 것의 영원불변한 근원이기에 '진리' 그 자체이시다. 그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시기 전부터, 우리의 구원자이며 우리의 길이며 우리의 생명이셨다. 그러나 영원 속에 계시며, 하늘 보좌에 앉아계시기에 어떤 인간도 찾을 수 없었고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으셨다. 그 분이 세상에 오셨다. 우리 곁에 오셨고,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문자로) 기록된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함께 하는 살아계신 말씀', 이렇게 두 말씀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종교, 참된 기독교는 진리를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진리를 추구하는 기독교는 진짜 기독교가 아니라는 뜻이 된다.
참 생명이신, 참 빛이신 예수께서 죄인을, 어둠을 찾아오셨다. 그렇다, 죄인이 진리를 추구하고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가 죄인을 찾아와, 죄인 속에 거함으로써, 그 전까지 죄인을 채우고 있고 죄인을 얽어매고 노예로 부리고 있던 거짓을 몰아낸다. 죄인을 찾아온 그 진리의 능력, 생명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죄인은 '참된 의'를 누리고 '참된 생명'을 영원토록 누린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자신의 염원은 그 염원의 강렬함에 의해, 간절함에 의해, 결국 성취될 것이라는 저 이방종교의 믿음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믿음이다.
그런데 신학공부를 제법 긴 시간 동안 나름(?) 열심히 하다보니, 신학의 어떤 주제보다도 어려운,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하는, 결국 모든 신학적 주제들을 공부하는 최고의 목표 가운데 하나는 "믿음"의 실체를 깊이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섣부를 때에는, 아니, 하룻강아지 같은 수준일 때에는 '믿음'처럼 쉬운 것이 어디에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었으니,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굳건하게 하는 것이 최고의 과제라고 생각했었다. 열심히 믿고 굳세게 믿음을 붙들면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진 믿음에 대한 나의 순수성이 내 믿음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목회자로서의 내 사명은 나와 같은 믿음을 갖도록 사람들을 가르치고, 믿음을 배반하지 말고 정절을 지키라고 다짐시키는 것이 전부인 줄로 알았다. 그렇게 믿음을 지키면 복을 많이 받는 줄로 알았다.
정말이지,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그 믿음을 고백하고 전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이다. 그러나 내가 예수를 마음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진리 그 자체이며 생명 그 자체이신 예수께서 내 마음에 들어와, 항상 나와 함께 하시며, 내 삶을 주관하신다면, 그 예수를 믿는 나의 믿음, 나의 마음, 나의 삶 즉, 나의 언행심사는 그야말로 '진리'로 가득 차야 한다. 그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그렇다면, 나의 삶은 나의 진리, 나의 순수성이 아닌 예수라는 진리, 예수의 신실함, 에수의 순수함이 가득 차있고, 그럼으로써 나라는 사람의 존재는 진실무망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겠는가? 예수처럼 거짓된 사람, 거짓된 증언, 허망한 야심을 극도로 싫어하며 증오하고, 거짓 선지자를 거침없이 거부해야 마땅히 않는가? 참된 믿음을 가졌다면, 허망한 약속을 즐거워할 리가 없지 않는가?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특히 미워하고, 유대인들의 믿음과 삶을 조금도 신뢰하지 않고 회개를 촉구한 까닭은, 저들은 자신들이 가진 기준에 미달하는 사람들을 자신들의 삶의 영역에서 멀리 밀어냈다. 몰아냈다.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쓸어냄으로써, 자신들의 공동체를 무흠한 상태 즉, 거룩의 상태에 머물러 있도록 애를 썼다. 하나님의 법규를 그렇게 해내는 잔인한 도구로 사용했다.
정작 문제는 그 자신이고, 자기 자신이 저주를 초래한 원인인데 남의 탓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참된 거룩을 소망하면서도 거짓을 참이라고 믿었다. 자기 안에 본래부터 있었더 '거짓'을 꼭 껴안고 있으면서, 참된 말씀, 참된 구세주, 참된 메시아를 밀어내면서 메시아가 와서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거짓 믿음을 어찌할꼬!! 아편이 영육을 망가뜨린다고 한탄하면서, 자신은 아편중독을 스스로 치유할 능력이 없다고 정직하게 고백하면서, 끊임없이 아편을 찾는 아편쟁이와 같이 거짓된 것을 찾는다면 어찌될까?
결국, 믿음의 싸움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싸움은 내 안에, 내가 끌어안고 있는 온갖 '거짓'을, 거짓을 믿는 거짓된 지식과 믿음을 찾아내, 진리로 바르게 하여 진실무방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하루하루의 싸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