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5]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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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정체성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신학관련 소논문을 읽고 신학교에 다니는 교회교사로부터 신학교 수업내용의 일부를 공부할 기회가 있더라도, 신학공부를 한다거나 신학공부를 해야 한다는 목적의식이 전혀 없었다. 그저 단순했다. 어렵게 할 뿐인 성경공부였을 뿐이었다. 성경적 신앙을 함양하고 성경적으로 사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예수교 성결교회의 교단신학교인 안양 성결교 신학교를 진학하기로 했을 때에도, 단지 성경적-보수신앙을 배우기를 바랬을 뿐이다. 신학을 공부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고 오히려 신학공부의 준비단계로서, 내가 함양해온 보수적-성경적 신앙의 토대를 단단히 할 수 있기만을 바랬다. 성결교신학교는 내가 집에서 통학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보수적 신학교였다. 입학시험을 치를 때 신학과 면접에서 "저는 신학을 배우겠다는 기대보다는, 성경을 배우고 신앙을 배우고 싶을 뿐입니다"라는 답변과 또 다른 답변으로 인해, 지원자 가운데 최저 점을 받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당시에는 조직신학이 3학기 과정으로 편제되어 있었고, 역사상 처음으로 '웨슬리-알미니안 조직신학 개론'이 김용련 목사님의 수고로 번역되어 공부하게 되었으나, 공부를 할 수록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 때문에 여러 조직신학 서적을 늘어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면서 공부를 함으로써,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위에 은혜가 넘친 과정이었다.
그런데 조직신학 공부를 하면 할수록, 웨슬리 조직신학에 대한 고민이 커졌다. 웨슬리의 열정은 알겠는데, 웨슬리적 조직신학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깊어가는 고민은 근본적인 탐구에 더욱 매달리게 만들면서,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어느덧 익숙해진 용어들의 정확한 개념을 찾아 도서관을 헤메기 시작했다. '보수주의' '근본주의' '은혜' '영성' '칼빈주의' '알미니안주의'... 그때 확실하게 알았던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듣고 사용하는 용어를 실제로는 모른다는 것이고, 정확하게 모르니까, 사용할 때마다 용어의 개념이 우리 자신도 모르게 바뀐다는 사실이었다.
보수주의를 강조하는 신학교수를 찾아가 '보수주의 신학'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질문하였지만 결국 교수도 정확하게 모른다는 결론을 얻었다. '보수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유명한 책을 읽었지만 자유주의에 대한 방어적 태세라는 것은 알았지만 보수주의 신학의 구체적인,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상당한 세월이 흘러서 깨닫게 된 것은 어떤 특별한 자극이 없었기 때문에 속된 말로 '우연'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지만 당시의 혼란과 몸부림은 "신학적 정체성"에 관련된 천착이었다. 침례교 목사로서, '침례교 정체성'에 대한 글을 쓰고 주장을 할 때에도 '침례교인은 침례교인 다워야 하고, '장로교인은 장로교인 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뭔가를 묻고 그 정확한 답변 즉, 개념을 찾는 것은 정말이지 지난한 과정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왜 정체성을 찾아야 하는지를 확실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신앙적 정체성과 신학적 정체성에 괴리를 없애고, 신앙과 신학을 일치시키기 위해 신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판단되었다. 두 번째는 신자가 신자다워지고, 그 신자다움 위에, 거듭난 자로서의 자기 다움을 확립하기 위함이다.
정체성이 없다면,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고, 그 불안정성이 악화되면 병든 상태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건강한, 바람직한 자아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것이 신자의 성숙이며, 그 개념을 명확하게 하는 데에 '신학'이 필요한 것이다.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다. 침례교인이라면 침례교인이 누구이며, 어떻게 처신하는지를, 무엇이 옳은 것이며 어떤 것이 나쁜 것인지를 분명히 아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혼란과 어둠 속에서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혹은 해도 되는지, 해서는 안 되는지를 스스로 안다는 것이다.
자아정체성을 경험적으로 체득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체성 확립은, 무수한 경험을 통해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정체성 혹은 개념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경험도, 그 경험을 분석하고 판단하고 다듬지 않고는 '개념화'할 수 없다. 그리고 개념화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 혹은 자손들에게조차 제대로 물려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개념화를 완성도 높게 확립하지 않는다면, 무수한 경험과 교훈 그리고 지혜가 축적되지 않고 허무하게 사라질 수 있다.
노인으로부터 어린 손자가 '정체성' 및 그와 관련된 '개념'을 충분히 전수받을 수만 있다면 인생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하면서 혹은 무엇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완성할 것인지를 똑바로 추구하는 길을 확실하게 추구할 수가 있는 것이다.
결국 교육이란 정체성을 그 다음 세대에게 선물로 주는 과정이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들은 정체성을 거의 완벽하게 상실하였다. 교회의 모든 부패는 자기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등을, 그리고 그에 반해서 나는 누가 아닌지, 어떻게 살면 안 되는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등등을 잊은 데에서 생겨난다. 정체성 회복은 우리 시대의, 가장 진지한 신학적 과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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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의 혼돈, 인지부조화
육군 사병으로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하여, 조직신학 과목을 공부하면서는 헨리 디이슨('Henry C Diessen)이라는 신학자의 책을 알게 되었다. 내 신앙적 은사의 은사인 성기호 교수의 강의시간에 영감과 성경무오론에 대한 설명을 듣던 중에 이 이름을 듣게 되었고, 그의 조직신학 책 'Lectrures in Systematic Theology'의 존재 또한 알게 되었다.
당시, 조직신학 책 혹은 문장을 정확하게 분별할 능력이 상당히 부족했던 나는 어디에선가 확인하게 된, 이 책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 즉, 온건하되 치밀하고 칼빈주의에 지나치게 경도되지 않으면서도 웨슬리적 영성도 포용한다는 식의 설명을 듣고, 헨리 디이슨과 그의 조직신학 책을 좋아하게 되었다.
헨리 디이슨의 Lectures in Systematic Theology는 원래 초판이 1949년에 간행되었고, 1979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그리고 1986년에 침례신학대학 권혁봉 교수가 한글로 옮겨 출간했다. 나는 정말이지 큰 맘을 먹고 1979년 개정판을 구입했다. 1986년에 번역출간된 권혁봉 역의 '조직신학강론'은 읽어본 적이 없지만, 침례신학대학에 대한 큰 호감을 갖게 된 것은 분명했다.
1990년에, 침례신학대학 신학대학원에 입학하면서 대전 땅을 밟게 되었다. 이때 무슨 근거인지는 몰랐으나 나는 헨리 디이슨의 '조직신학강론'을 제대로 배울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면서 정말이지 큰 기대를 품게 되었다. 그러나 2학년에 진급하면서, 조직신학 강의 시간에 정말이지 큰 실망을 하게 되었다. 아니, 처음에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래도 기대는 했다.
나는 그 당시에도 지금에도, 침례교 정체성은 '보수주의적'이며 '복음주의적'이라는 특성을 견지한다고 믿는다. 물론, 좀 더 분명히 하면, 잉글랜드 특수침례교회 신학전통을 뿌리에 두고 "미국 남침례교회"(Southern Baptist of America) 전통에 부합하는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 판단한다. 그런데 이것은 신자의 신앙과 마음가짐, 그리고 태도에 있어서는 맞는 말이지만 신학공부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90년 초에, 침례신학대학 학부와 신학대학원의 조직신학은 E. Y. 멀린스(Edgar Young Mullins)라는 신학자의 책을 텍스트로 사용하고 있었다. 문제는 멀린스의 조직신학을, 칼빈주의 신학과 알미니우스 신학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합리적 중도노선을 취하면서도, 관념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체험'을 중시하는 신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런 생각은 조직신학 교수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가르쳤던 것이다.
그런데 텍스트를 실제로 보면, 그 첫 문단에서부터, 멀린스는 '자유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신학이었고, 그 신학을 전개하는 중심에는 너무나도 뚜렷하게 '칸트와 슐라이엘마허'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 이 양극단의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은 중도노선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철저한 자유주의 신학이었던 것이다. 조직신학이라는 이름의, 외투를 걸친, 독일철학을 하는 셈이었다.
자유주의 신학자 가운데 좋은 성품을 가진 이들이 있음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 자체는 싫어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그 이름과는 달리, 실제로는, 상당히 파괴적이다. 독선적이다. 원래 태생이 그렇다. 독일철학 즉, 칸트철학을 철학 그대로 배우는 것과, 그 철학에 의거한 즉, 철학화한 신학을 배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를 발생시킨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문제는 멀린스 신학을 공부하면 신학의 주요 개념이 뒤죽박죽이 되고,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결국, 신학공부를 하는 이의 인식구조가 뒤틀리게 된다. 인지부조화가 발생하게 된다. 시간이 갈수록 심화된다. 극복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지게 된다.
그런데 만일 멀리스의 신학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그 실체를 한국인, 한국의 기독교인, 목사의 입장에서 정확하게, 솔직하게 가르쳤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이런 경우라면, 인지부조화는 최소화되었을 것이고, 정체성의 혼돈을 야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Th.M 수업시간에 들었던, 당시 담당교수가 넌지시 나를 돌려까듯 던진 말을 기억한다. "깐깐하게 따지는 것은 교회에서 신자들을 가르칠 때 하는 것이고, 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는 부드럽고 적당히 하는 것이야!"라고....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분명히 확신한다.
신학의 주요 개념을 똑바로 철저하게 파악해야
신앙의 정체성이 선명해지고,
자기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똑바로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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