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교 목사가 왜 장로교 역사만 다룹니까?
침례교 목사이며, 침례교 역사적 정통성을 천착하고 고집하는 침례교 역사를 다루는 동영상은 만들지 않고, 벤자민 워필드의 신학을 소개하는(?) 동영상을 연속해서 만든다.
돌이켜보면, 신학다운 신학책은 '장로교 신학자'들의 책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놀랍게도 신학교(학부) 과정을 마치고 신학대학원(M.Div)에 진학했을 때까지도 '설교자의 왕자'라는 칭호로도 불리는 찰스 스펄전이 장로교 목사인 줄로 알았다. 아더 핑크조차도 장로교 일각에서는 침례교 인물로 분류한다는 사실이 의아스럽기도 했다.
침례교의 본질을 드러내주는 책자를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침례교 최고의, 최대의 신학자인 John Gill과 그의 신학을 계승한 잉글랜드 특수침례교회 인물들은 한결같이 "고등칼빈주의자"(Hyper-Calvinist)라는 인식은 지극히 명확하게 판명된 부동의진실, 불변적 팩트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그 인식을 명확하게 뒷받침해주는 분석자료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인식만 공유하고 있었다. 그 인식을 드러낸 자료들을 곰곰히 되씹어보면 볼수록 실제 자료는 보지 않았다는 징후만 드러났다. 역사적 침례교 자료는 Untouchable? 의아스러웠다. 그만큼 자료를 구하기도 해독해내기도 쉽지 않았다.
이는 교회정체론에도 그대로 연결된다. 교회정체론에 관련된 자료는 장로교쪽 자료가 압도적이다. 그런데 실제로 공부를 하다보면, 장로교쪽 자료도 깊이가 없다. 이데올로기적 강조만 반복된다. 교회정체를 심도있게 분석하고 자료를 추적한 저술은 거의 없다. 17세기 최대의 신학논쟁 주제의 하나가 '교회정체론' 논쟁이며, 19세기에 그러한 자료를 집대성하여 정리한 이가 스코틀랜드의 저 유명한 지도자, 장로교 최고의 신학자 가운데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할 인물 William Cunningham이다. 이 분이 집대성한 자료를 도무지 구할 수 없어 Still Waters라는 곳에 복사본을 구입하겠다고 연락했고, 실제로 잘 제본된 복사문을 받아보기까지 대략 6개월이 걸린 적도 있다.
잉글랜드의 저명한 청교도 토마스 굳윈이 '회중주의' 교회론을 저술하고, 가톨릭 교회론과 장로교 교회론을 공박한 저술을 남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훗날의 일이다.
자료를 구하는 것도 어렵고, 그 자료들을 소화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웠다. 소회된 그것을 표출할 수 있도록 정리하는 것은 그 보다도 더 어려웠다.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해체할 전략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고정과념에 도전하는 것은 어쩌면 어리석은 짓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
- 종교개혁은 루터가 시작하였다.
-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게재하자 온 유럽이 하루아침에 뒤집어졌다'
- 루터는 칭의의 신학자이고 칼빈은 성화의 신학자다.
- 존 웨슬리는 알미니안이다.
등등인데... 일말의 진실 혹은 약간의 사실을 전체로 확대하는 식인데 오류로 끝나고 마는 논법의 결과물이다.
웨슬리의 성화론을 동영상으로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을 할 때부터, 이 일은 단순하게 성화론을 소개하는 것도 개혁주의 입장에서 분석하는 것도 아닌... 역사적 맥락에서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할 때 상당히 곤혹스러운 과제가 된다.
그럼에도 이 과제를 피할 수 없는 것은, 개혁주의 신학에서 출발한 것이 침례교회의 시작이다. 따라서 침례교회의 역사성을 천착하고 신학적 정통성을 확립하는 이들은 철저한 개혁주의자들이다. 하지만 18세기 후반부터, 침례교인들은 소위 "웨슬리의 영성"을 침례교회의 가슴에 품었고 혈관에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이 두 가지가 하나의 교단 안에서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느냐는 것은 당연한 질문이지만 이해하기란, 이해할 수 있도록 소화하기란 쉽지 않다. 하나의 교단 즉 잉글랜드 특수침례교회 안에서 칼빈주의 신학과 웨슬리적(복음주의적) 영성은 격렬하게 충돌하는 것으로 역사에 족적을 남겼다. 그 내홍은 대결로만 끝나지 않았다. 기괴하게도 modified calvinism이라는 노선(?)도 생겼지만 Evangelicl Calvinism이라는 용어와 노선(?)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신학이라는 측면에서는 '혼란'이 발생한 것이다. 이로 인한 갈등은 저 유명한 찰스 스펄전의 죽음 이후까지 이어졌다. 엄격한 정통파적 신학을 공부하고 추구하는 사람으로서는 걱정스러운 일이며, 사명감을 굳건하게 다져야할 일이다.
그러나 교회정체론, 교회정치체제라는 측면에서 보면, 완벽하게 다른 그림이 보인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존 웨슬리는 18세기에 등장하여 엄청난 논쟁을 야기했는데, 웨슬리 영성이라는 측면에서는 17세기까지 계승된 신학체계 및 체제의 유효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요샛말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한 셈이다. 웨슬리는 칼빈주의, 아르미니우스주의라는 패러다임을 거부했다. 웨슬리는 자신의 패러다임을 만들었다. 이 패러다임은 '웨슬리 영성'으로 칭하였고 '감리교회'라는 형태로 표출되었다.
감리교회 체제의 불안정성은 미국 감리교단이 20세기 초에 방향성을 수정하면서, 웨슬리의 옛 영성을 고수하고자 "성결파"가 분리해 나가 성결교단을 만드는 길로 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것은 교단체제가 갖는 특성이 20세기라는 또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에 적응하는 방편이기도 했다. 장로교단이 19세기에 겪은 교단분열 또한 교단체제가 갖는 경직성 때문에 분열한 전철을 비슷하게 밟아간 것이다.
침례교단은 달랐다. 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한 침례교단 즉, 미국 남침례교단과 북침례교단은 남북전쟁을 전후로한 갈등 때문에 분열한 것 이외에는 교단분열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미국 남침례교단이 계승발전시킨 교회정치체계는 간단하게 말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놀라울 정도로 어렵다. 마치 일류 축구선수가 그라운드에서 활약하는 장면, 그의 실력의 장단점을 말하기는 쉽지만 그 선수처럼 그러운드에서 뛰기란, 그 비슷하게나마 역량을 갖춘다는 것이 어려운 것과도 같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나라와 교회의 장래를 생각해보면, 침례교 특유의 교회정체론을 이해하고, 그 실천을 확대하는 것은 역사적 필연이다. 교회를 다니는 것은 믿음을 견지하고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 결과가 무엇이냐, 왜 그렇게 중요하냐고 할 때,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함이라는 설명은 만족한 답변이기는 해도 결코 충분치 않다. 믿음과 예배는 사람을 만들기 위함이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함이다. 교회를 지키는 싸움은 사탄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한 싸움이라기보다는 사람다운 사람, 하나님과 세상에 쓸모가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연마의 과정이라는 싸움이다. 그런데 신자라는 사람이 교회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교회를 교회답게 이룬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한 무지와 싸우는 작업이 내가 오랫동안 공부해온 방향성이며, 지금 수행하는 작업이다.
쉬운 일이 아니지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기에.. 해야만 하는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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