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08]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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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리더십은 어떤 종류의 리더십일까?
'한국인'의 특성을 다룬 유명한 작가가 있었다. 일간지에 실린 짤막한 글은 언제나 정곡을 찔렀다. 그 글쓰기를 닮고도 싶었고, 그 안에 담긴 통찰은 결코 잊고 싶지가 않아서 열심히 스크랩도 하고, 책자로 발간되면 구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법 시간이 흐른 뒤에, 그 글들은 얼마만큼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일본 작가의 글을 표절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해서 그 유명 작가의 글은 빠를 속도로 잊혀졌다.
다시 몇 년인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집에 모아놨던 글들을 읽어보니 헛점들이 많이 보였다. 첫째는, 왜 그 특성을 굳이 그런 식으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설득력이 사라졌다. 둘째는, 그 특성들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주는 사실들의 객관성이 부족했다. 해서 나도 그 작가의 글들을 버리기로 했다.
신학교 즉, 학부과정의 신학을 공부할 때에는 그 글들이 무척이나 신선했다. 세월이 지난 뒤에 다시 보니, 그 신선한 느낌은 글쓰기 기법에서 나온 듯했고, 글의 내용이 객관적이고 정확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들이 실은 그 작가의 주관성, 혹은 원래의 작가가 가졌던 편향된 시각에 '가스라이팅'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러한 나의 경험은, 한국인의 특성에 대한 유명한 어떤 작가의 글에 국한되지 않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제자훈련'과 'LTC'(Leadership Training Course)라는 것이다. 본래는, 교회 밖 대학생선교단체들의 '프로그램'들이다.
당시부터 지금까지, 한국의 교계에서 오해했던 것이 무엇인가 하면, 중소규모의 작은 교회들이 정규적인 예배를 드리고, 제직들을 임명하여, 교회의 살림살이를 꾸려나가고, 기껏해야 심방하고 전도하는 것이 교회가 하는 활동의 전부이며, 성경공부 프로그램 하나 변변치 않고, 리더십 트레이닝이 없는 것을 보고서는, 교회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 점이다.
대학생 선교단체들이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운용하자, 교회의 청년 대학생들이 교회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 교회에는 없는 프로그램 때문에 선교단체로 빠져나갔다.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열심히 좇아다니고, 리더십 프로그램에 참여함으로써, 훨씬 나은 '인재'로 계발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보다 큰 위험한 착각이 없다. 이보다 한국교회를 망가뜨린 더 큰 해악이 있을까 싶다.
'리더'(leader)는 고대 영어에서 나온 단어다. 영한사전을 찾아보면, 혹은 영어 어원사전을 찾아보면, 'lead'라는 단어의 개념은 '이끌다'라는 점에 있음을 공통적으로 지적한다. 그런데 '이끌다'라는 말만으로는 충분히 소화된 것이 아니다. 좀 더 개념을 파보면, '이끌다'라는 것은 '앞장 선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국문화를 생각해보면, 거의 대부분의 부모는 자식들에게 '네가 앞장 서지 말라'라고 당부한다. 한국 근대사에서 이 보다 더 적절한 처세훈이 없다고 느껴진다. '문제가 생겼을 때 네가 튀는 행동을 하지 말라'라든가, '눈치껏 행동하라'라는 조언이 상식처럼 튀어나온다. 그래서 어떤 사안이 발생하여 의견이 충돌하고, 세력이 부딪히게 될 때, 언제나 그 앞장 선 사람들의 '배후'에 누가 있다는 해석이 횡행한다. 거의 예외가 없다.
이러한 문화는 '리더'라는 문화가 전혀 없거나, 전적으로 다른 리더십을 가진 문화다. 리더(leader), 본래의 개념과 사실상 완벽하게 다른 문화인데, 이런 문화에서 리더, 혹은 리더십, 혹은 ledership training이라는 것이 철저하게 변질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문화에서 자연스러운 '리더'란 배후조종자에 다름 아니다. 가장 이상적인 예를 삼국지연의에서 찾자면 '유비'같은 인물을 '리더'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러 부하들을 거느리며, 머리 쓰는 일은 제갈공명에게 맡기고, 우악스럽게 힘을 쓰는 일은 장비에게 맡기고, 군대를 효과적으로 통솔하는 것은 관우를 비롯한 장군들에게 맡기는 것, 그리하여 유비처럼 '제왕'이 되는 능력이 리더십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 '분수를 알라'라는 말과 '억울하면 출세를 하라'라는 말을 덧붙이면, 한국의 저 유명한 대학생 선교단체들에서 시작된 '리더' 및 리더십 트레이닝, 제자훈련의 본질, 본색이 정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90년대 이후, 대학생 선교단체에서 훈련된 이들이 신학대학을 나와 교회에 침투하여 목회자 노릇을 하게 되면서, 교회 안에 유행하는 제자훈련, 리더십 트레이닝의 본질, 본색이 정확하게 드러난다.
이쯤 되면, 감리교회의 감독정치, 장로교회의 장로정치, 침례교회의 회중정치가 왜 다른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한국인으로 태어나, 한국사회에서 성장하면 유치원 때부터, 군대와 사회 전체가 일종의 "군사문화"처럼 계급구조로 되어 있기에, 리더십 조차도 "리더십 사닥다리"처럼 계층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아무리 리더십 트레이닝을 거쳤더라도, 하사관에서 초급 장교, 영관급 장교, 장성급 장교로 진급하듯이 계층에 따라 권한의 폭이 달라지는 리더십 개념을 몸에 익히고, 그외의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된다.
계급구조, 상명하복, 통제와 복종 속에 있는 '리더'란 실질적으로는 결단코 '리더'가 아니다. '리더'가 '이끌다'라는 뜻이라면 이는 '앞장서다'라는 뜻에 다름 아니다. 이는 전쟁터에서 적진을 향해, 부하들보다 앞에 서서, 가장 앞에서 돌격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자면, 가장 위험한 자리에 뛰어드는 것이다. 가장 큰 위험을 스스로 초래하여 감당하는 것이다. 전성기 영국 군대의 군대문화가 바로 이렇다고 한다. 전투가 벌어지면 가장 앞에 서는 것이 초급장교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영국군에서는 소위, 중위 급 지휘관의 전사율이 가장 높았다고 한다. 영국 사회에서도 전투가 벌어졌을 때 가장 먼저 "전사"한 사람을 가장 존중하고, 그 전사자의 집에 표식을 달아두고, 그 집 사람들을 명예롭게 여긴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이러한 "리더"의 개념이 미국으로 건너가 발생한 단어가 '프론티어'(frontier)라고 볼 수 있다. '프론티어'라는 단어는 프랑스어 '프롱티에르'(frontière)에서 나왔다고 한다. '프론트' 혹은 '프롱티에르'는 경계선이라는 뜻이다. 아메리카 식민지 시절에 이 단어는 '문명의 끝'이며, 문명인이 살지 않는 지역과 맞딱뜨린 곳이라는 개념이다. 바로 그곳으로 과감히 들어가서, 그 문명의 끝인 경계선을 더 멀리 밀어내는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 '개척자'라는 것이다. 이 역시, 가장 위험한 곳에 가장 먼저 들어간다는 뜻이다.
따라서 '리더'라는 개념은 성공하기는 지극히 어렵고 실패할 확률이 지극히 높은 곳에 직접 가서, 시행착오를 경험하고 손해를 감수하는 행위이다. 이런 식의 리더라면 달콤한 열매를 획득할 가능성이 그다지 크지 않다. 한국문화의 경험에서 '앞장 서지 말라'라는 충언이 일반화된 까닭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앞장서는 것이 진짜 '리더'이다.
마틴 루터, 혹은 존 칼빈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얀 후스, 위클리프, 사보나롤라 등을 생각해보아도 그들은 진리를 들고, 맨 앞에 서서, 온갖 화살을 온 몸으로 맞은 사람들이다. 마틴 루터를 기념하고, 존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열독하는 까닭은 그들이 발휘한 신학적 역량과 리더십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들의 신학이 그들에게 성경적 정신을 불어넣어, 오류와 과감히 맞서 싸운, 참된 '리더십'을 발휘하게 하였다면,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바로 그들과 같은 신학뿐만 아니라 그들과 같은 진짜 '리더'들이다.
하나님이 진리의 하나님이며, 하나님은 오류와 거짓을 혐오하는 분이시다. 종교개혁자들도 오류에 맞서 싸우고, 진리를 부르짖으며, 교회를 진리의 등불이 되도록 하는 싸움에서 가장 앞장 섰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목사들, 장로들, 심지어 안수집다들은 옳고 그름을 끝까지 분별하여, 진리의 편에 서서 굳세게 버티는 원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옳고 그름의 싸움 조차도, 옳고 그름을 분별하기를 포기하고, 양쪽 세력으로 나뉜 분열현상에 주목하여 두 세력의 화합을 목적으로, 하나의 조직체, 통일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관념으로 치우쳐진다.
가짜 리더들이 넘쳐나니, 정치적 중립주의를 선호하고, 그리고 이기적 세력집단을 유지하여 삿된 이익을 도모하는 것을 축복이며, 성경적 원리라고 자기 세뇌를 일삼는다. 이런 경우가 너무나 많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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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들의 하류정치
교회정치체제를 연구해보면, 교회의 규모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아니, 없다고 느껴진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감독정체와 장로정체와 회중정체가 만나는 지점, 일치점이 있다. 감독정체는 감독의 존재가 곧 교회 됨의 본질이지만 그 감독권을 행사하는 지역이 광대하다보니, 지역을 분할하여 '감리사'를 두어 감독하게 하지만 이 역시도 복수의 교회로 나뉘어져야만 신자들이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이렇게 신자들이 참여하여 실제로 예배를 드리는 곳을 '개체교회'라고 한다. 감리교회의 이 개체교회에 해당되는 곳을 장로교회에서는 '예배당'이라고 불렀는데 장로교 헌법상 명칭은 '나뭇가지'라는 뜻의 '지'를 붙여 '지교회'라고 부른다.
침례교회 즉, 회중주의 교회정체를 채택한 경우에는 감리교회의 '개체교회, 장로교회의 '지교회'에 해당하는 것을 '회중'(congregation)이라고 부르는데 회중정체에서는 '회중'(congregation)과 교회(church)를 동의어로 사용한다. 감독정체나 장로정체에서는 '회중'은 교회가 아닌 '공동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명칭과 정의가 아니라 규모라고도 볼 수 있다. 회중정체를 제외하고는 감독정체와 장로정체는 하나의 예배공동체에서는 담당 목회자 1인을 중심으로,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규모를 그 한계로 정한다. 이 한계를 넘어서면, 교회를 확장하기보다는 교회를 분할하였다. 종교개혁의 결과로 개신교회들이 창립되면서부터 그렇게 했다. 아니, 어쩌면 초대교회 때부터 기독교는 이렇게 해왔던 것이다.
이런 개념을 규모에 적용하면, 1개의 개체교회(다른 말로, 지교회 혹은 회중)은 500명을 넘길 수 없다. 안정적인 분할을 생각하면, 교인수가 300명에 달했을 때부터, 교회분할을 염두에 두고 착실하게 준비를 하면 좋을 것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모교회에서 분할되어 나아갈 때, 좋은 목사와 그 목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교회를 안정적으로 정착시키 위해 동역할 평신도 지도자들(장로, 집사)을 준비하고 훈련해야 한다. 목사를 준비하는데에는 최소 5년에서 10년이 걸리니 차근차근 준비할 시간은 충분하다.
이것은 사실, 초대교회 때부터 실행되었던, 그러나 명목상 기독교화 되었던 중세 때에는 표면적으로는 잊혀졌던 'Church Planting' 개념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숫자는 '500'이다. 500명이라는 수자는 전통적인 군대 특히, 육군에서 1개 대대의 규모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어디쯤인가에서부터 '(군대)리더십' 연구가 발생했다. 유럽의 전통적인 군사강국은 '군대 리더십'이란 곧 귀족계급의 전유물이었고, 그것을 당연시했으니, 리더십 연구보다는 리더의 '전술적-전략적 기량'이라는 측면에서의 '전쟁술' 연구가 중요했다.
하지만 군사적 약체를 면치 못하는 사회체제를 극복하고, 군사강국들을 이겨야 하는 나라들 즉, 프러시아라든가 미국의 경우에는 리더십 연구가 필요했다. 특히, 미국의 군대 리더십 연구가 오늘날, 전 세계적인 리더십 연구의 흐름을 만들었다.
그런데 리더십 연구를 해보니, 500명까지는 탁월한 리더십 트레이닝이 그다지 필요치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개 대대를 책임진 대대장까지는 자신이 맡은 500명을 인격적 관계가 형성될 수 있고, 인격적인 접촉을 통해 신망을 얻을 수만 있다면 대대규모에 주어진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 즉, 어지간히 리더십이 없더라도 대대규모는 어지간한 수준의 지적능력만 갖추고 있다면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1명~2명의 참모장교와 중대장들과 소대장들로 구성된 장교단, 하사관단의 도움으로 문제 없이 부대를 지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500명의 규모를 넘어선다면, 본질적 의미에서의 '리더로서 충분한 역량과 훈련'이 없이는 제대로 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대대장까지는 참호에서 병사들과 뒹굴고 병사들에게 호령하면서 지휘하여 전투목적을 달성할 수는 있다.
그런데 5백명이 넘어가면, 즉 연대장이나 여단장 급이 되면 더이상 병사들을 지휘하는 것이 아니다. 더이상 전투를 벌이는 현장의 병사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중대 대대 단위의 조직체들의 움직임과, 전선 자체의 흐름 즉, 전략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이들이 지휘하는 것은 병사들이 아니라 장교단이다. 새로운 차원의 사고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개혁주의적 신학의 관념에서 보자면, 정치란 사람들 사이에서, 원죄 때문에 발생하는 오류와 불협화음 즉, 인간관계 상에서 발생한 질병을 치유하는 것이다. 인간관계란 관계된 사람들의 질과 규모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복잡해진다. 신혼부부 사이에서도 정치가 발생한다. 그리고 정치를 필요로 한다.
군대에서도 정치가 필요하다. 그래서 공산권 군대에는 '정치장교'가 존재한다. 민주주의 진영의 군대에서는 이 역할을 하는 장교를 '정훈장료'라고 부를 뿐이다. 분대, 소대, 중대, 대대 단위마다 그 단위 내에서 정치가 존재한다. 각급 지휘관은 군사적 리더인 동시에 '정치가'인 것이다. 결국, 리더십 트레이닝이란 '정치역량 훈련'에 다름 아니다. 군대에서 '정치역량'이 부족하지만 군사적 재능이 탁월한 경우 '참모장교' 혹은 '기능직/전문분야 장교'로 복무할 수 있다.
따라서 군대에서는 어지간한 사고가 없다면, 그리고 열정을 다하면, 따라서 정규 사관학교 출신이 아니더라도 '대대장'까지는 진급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의 진급 혹은 출세는 전혀 다르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대대장까지는 아주 특이한 경우가 아니고는, 단일한 목적 및 기능의 병사집단을 통솔한다. 보병대대, 포병대대, 공병대대, 전차대대를 생각해 보면 된다. 심지어 포병대대의 경우, 포의 크기도 대대별로 통일되어 있다. 그러므로 대대급 이하에서는, 정치력 혹은 리더십이 생각 밖으로 (상대적으로) 단순하다. 사단장은 아무리 가장 단순한 '보병사단'이라고 할지라도, 예하에 포병대대, 전차대대, 자동차화 대대, 보급대대 등등의 각종 직능 대대들을 통합하여, 군단 즉, 전략단위의 한 축을 담당한다.
사단 규모를 1만명~1만 2천명으로 산정하고, 6천~8천 명을 준장의 장성이 지휘하는 '여단'이라고 본다면, 500명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차원이 다른 리더십과 정치역량을 요구하는 조직체계를 접하게 된다. 군대리더십에서도, 이에 걸맞은 리더 자질을 갖지 않은 사람을 '리더십 트레이닝'을 통해 길러낸다고 보지 않는 것이 맞을 것이다. 더군다나 '전략'을 구사하는 최소단위인 '군단'의 한 축을 구성하면서 그 전략을 실행하는 하부단위인 '사단'의 복잡다단한 예하 단위들을 지휘 통솔하는 리더십, 정치역량을 리더십 트레이닝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를 교회로 생각해보면, 목사들은 '성경'과 '신학'의 단일한 직능 교육을 받고 그 지식역량을 기반으로 한 리더십을 토대로 교회를 책임진다. 군대로 치면 중대장이나, 대대장 급이며, 교인총회를 군대에 비교하면, 전투 및 훈련을 끝마친 뒤에 전원이 모여 사후토론회, 평가회를 하는 것에 비견할 수 있다.
개인적인 역량에 따라, 5백명 규모를 이끌던 실력으로 1천명을 이끌수는 있겠지만 모두가 그럴 수는 없다. 거의 대부분의 목사들을 중대형 교회에 데려다 놓으면, 실패하기 마련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은 깊이 따져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목사들의 정치는 3류정치, 뜨내기 정치, 엉망진창의 정치를 하는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고도의 정치적 기량을 갈고 닦을 기회도 없고, 교회문화에는 원래 그런 정치문화가 없기 때문이다. 미국교회의 경우, 이 한계점을 지역사회 문제, 지역현안을 다루면서 자연스럽게 타운십 컨퍼런스, 시의회에 진출하여 다루면서 역량을 강화했다는 측면이 있다면, 한국은 정교분리를 말하면서, 교회가 지역 커뮤니티 역할, 지역현안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전통을 스스로 외면하면서부터 제대로 된 리더십도 제대로 된 정치력도 함양하지 못했다.
여기에서 한국교회가 그 순수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엉망진창이 되고, 그 비정상이 정상인 것처럼 각인되고, 변질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70년대 이후로, 한국교회의 주요 구성원들은 교회체제, 시스템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배가 터질 것이 분명한데도 그 한계를 넘어서는 폭식을 추구해왔다. 끌어모은 것은 '잔기술'과 '선동'으로 성사시킬 수는 있어도 체계화하고, 제대로 작동케 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한다. 성공한 것처럼 보일 뿐이다.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대형교회의 속을 들여다보면, 온통 곪아있고, 교회다운 본질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숫적으로 성장을 이룩한 목사들의 꿈이 '성장'과 대형화에 있다면 필연적으로, 3류정치에 매몰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을 한 마디로, 썩은 정치, 썩은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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