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주일에 걸쳐 제가 받은 질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질문은 "개혁주의를 추구하는 신자가 전혀 개혁주의적이지 않은 교회에 출석할 때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당연하게도, 예배순서를 비롯하여 교회정치 등에서 개혁주의적이지 않은 원리들을 드러낼 때 어떻게 해야 마땅한지에 대한 질문이 따라옵니다.
물론 이 댓글에 대해 즉각적으로 답댓글을 달아드렸습니다. 그런데 위 질문에 대해 조금 더 발전된 설명을 공유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뉴스레터에서 이렇게 정리해봅니다.
위와 같은 질문은 16~17세기에 서유럽에서 진행된 종교개혁을 위대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전혀 보이지 않는 질문입니다. 마르틴 루터, 쟝 칼뱅, 훌드리히 쯔빙글리, 피터 마터 버미글리와 같은 인물, 심지어 사보나롤라, 얀 후스, 위클리프와 같은 인물에 대한 깊은 관심 때문에 그 인물(들)을 연구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인물(들)의 활동과 그 활동무대를 깊이 아는 것이 바로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영웅주의 역사관'이라는 틀에 의존하여 전체 역사를 해석하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이 역사관은 건강한 역사파악에 상당한 장애를 일으킵니다.
대개의 교회사 서적들은 '독일적 사관'이 지배적입니다. 19세기 이후에 대두된 독일중심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입각해서 전체 기독교 역사를 해석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독일 종교개혁을 종교개혁의 원류이며 원천이라고 한정하여 종교개혁 전체를 설명합니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독일 대부분이 파괴되었지만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은 프러시아가 독일 재건과 부흥의 중역을 맡으면서 독일민족주의와 독일중심주의는실제로는 프러시아 군국주의를 씨앗으로 합니다. 이 때문에 건강한 역사 파악을 어렵게 만드는 장애가 한겹 더 두터워졌습니다.
19세기에 들어설 때까지도 유럽사의 변방이었던 프러시아, 존재의미가 희미했던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의 역외식민지였던 프러시아가 독일을 만들었고, 그 독일이 역사의 중심이라는 정신세계에 함몰된 '역사학' 혹은 역사연구가 독일제국을 지배하고 미국 대학들을 지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프러시아의 영향을 받은 또 다른 나라 제국주의 일본과 그 식민지 조선의 대학들과 신학교가 직간접적으로 독일중심주의에 물든 기독교역사관, 교회사 교재들이 만든 수렁을 피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루터의 글 <독일귀족에게 고함>과 같은 글이 종교개혁을 촉발시킨 중요한 영향력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생각을 수동적으로 따라가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 유럽의 16세기 종교개혁은 '시민계급의 대두와 시민계급의 혁명'이라는 훨씬 더 중요한 흐름을 놓치게 됩니다.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경우, 헨리8세에 의해 로마 교황청의 지배와 간섭으로부터 독립된 잉글랜드 교회를 수립하기 위한 조치들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국왕권력의 독단에 의해 이뤄지는 과업이 아니었습니다. 잉글랜드 의회에서 결의된 법령에 의한 조치들인데, 이는 국왕과, 귀족들과, 시민들의 연합된 행동입니다.
헨리8세와 잉글랜드 의회가 잉글랜드에서 가톨릭 세력을 축출하고 불법화하고, 가톨릭 재산을 국유화하는 작업을 마쳤을 때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첫 단계가 완료되었습니다. 그러나 독립된 잉글랜드 교회의 신학과 체제 그리고 지배권을 놓고 갈등이 불거졌습니다. 이를 흔히 왕당파와 의회파라는 명칭으로 분류하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의회파는 실은 시민계층이 의회를 중심으로 활약했던 것입니다. 그 갈등을 정치권력의 향배를 놓고 설명하는 프레임입니다. 놓치게 되는 것은 잉글랜드 종교개혁에서 왕당파와 의회파의 갈등은 그 본질이 잉글랜드 교회의 종교를 누가,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있었던 것입니다. 즉, 국왕권력이 결정하느냐, 시민적 합의에 의해 결정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종교를 결정하는가?-
기독교는 계시종교를 그 정체성으로 갖고 있지만 그 계시된 바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난관에 부딪히거나 여러 대안들이 발생할 때 합의에 의한 의사결정을 하는 시스템이 DNA에 심겨져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삼위일체와 그 경륜에도 '합의'를 마치 전제처럼 깔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이삭의 시대까지도 '합의에 의한 의사결정 구조'라는 것이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 특히, 모세의 등장과 시내산 언약체결에서 '합의적 의사결정 시스템'이 구체적으로 완성된 동시에, 합의 시스템이 장차 가나안 진입 이후에 민족, 나아가서는 국가 운영의 기본체제로 활용하도록 마련된 것입니다. 그 합의의 중심, 합의의 기준은 '하나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중대한 의사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여호와의 회막 앞에 모여 율법책을 읽고 번제를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합의를 이뤄냈던 것입니다.
이 체제를 파괴하고 무효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 사사시대 말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고 그 욕망과 사울 왕의 욕망이 결합하여 권위주의적 왕정체제를 추구했던 것입니다. 다윗과 솔로몬 왕정은 그 권위주의적 변질을 바로 잡아 회복하여, 더욱 발전된 체제를 이뤄낸 것입니다.
성경 특히 모세오경을 근간으로 세계 3대 종교 즉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이 나왔습니다. 이 세 종교 모두 합의에 의한 의사결정을 내린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리고 온당한 합의를 위해, 경전을 연구하고 해석하고 학식과, 법학을 발전시켰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장을 교회수, 교인수의 증가라는 측면만 보면 안 됩니다. 고대 로마법 체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즉 시민법 대전(Corpus Iuris Civilis)으로 나아가게 하였다는 측면에서도 보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경우, A.D. 325년의 니케아 종교회의(Concilium) 혹은 공의회를 필두로 하여 그 전통을 확고히 해왔던 것입니다. 모든 회의체가 동일한 권위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개신교회는 A.D.451년의 칼케돈 종교회의(공의회)까지만 정당한 권위를 갖는 '콘실리움'(공의회)로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이때까지의 공의화는 그 이후의 공의회와는 달리, 의문의 여지없이 범세계적 공의회이며, 최고의 권위를 인정할 수 있는 질과 수준에서 결정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범세계적 공의회는 지역적 공의회에 비해 우월한 권위를 갖습니다. A.D. 451년 칼케돈 공의회 이후의 공의회에 대해서는 사안별로 수용하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합니다.
범세계적 공의회가, 비할 수 없이 충분한 성경해석에 입각하여 내린 결정을, 그 어떤 세속적 권력이나 지역 공의회가 간단히 파기할 수는 없습니다. 권위의 질과 수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정체성은 어떤 교파가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어떤 교파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장로교의 정체성은 어떤 혹은 몇몇 장로교단이 결정하여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장로교를 자처하는 모든 교단의 대표자들이 빠짐없이 모여 성경을 연구하고 토론하고 결정할 때에만 '장로교'라는 교파의 정체성을 수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그 이전의 다른 어떤 종교개혁가들과 다른 특색은 루터가 제기한 온갖 주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성경적 종교인가라는 문제에서 루터 이전에는 옛 서로마 제국 판도에 해당하는 지역에서는 당연히 로마주교의 권위로 모인 최고 수준의 '공의회'(콘실리움)에서 기독교라는 종교를 결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의 등장으로 인해 결국 1526년에 슈파이어 제국의회에서,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제후가 종교를 결정한다고 결의하였습니다. 이 결의안은 지금 우리가 '가톨릭'이라고 부르는 당시까지의 (라틴)'교회' 이외에 루터파 종교를 독립된 영역과 자치권을 갖는 제후들, 그리고 자유도시들이 루터교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신성로마제국 이외의 국가에서는 이 법령이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쯔빙글리와 칼빈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칼빈파' 즉, 개혁교회라는 또 하나의 선택지가 생겼는데, 그런데 개혁교회는 루터교회와 나란히 놓을 수 있는 제2의 대안에서 끝나지 않고 전혀 다른 방식의 교회를 만들어냈습니다. 신성로마제국 의회의 1526년 법령에서 개혁파는 선택지에서 제외되었으나 개혁파는 훨씬 더 강력한 영향력을 유럽사에 미쳤습니다.
즉, 개혁파는 각 개인이 양심의 자유에 따라 자신의 종교를 선택할 수 있다는 원리와 더불어, 여러 개인들이 회집하여 하나의 독립된 교회, 정확하게는 '회중'(congregation)을 세운다는 원리를 회복해낸 것입니다. 이 원리는 사도행전과 신약성경이 명확하게 보여준, 초대교회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사실상, 바로 이 특색 때문에 신약성경 특히, 사도행전에서 교회가 시작되었다는 주장이 일리가 있어 보이는 것입니다.
개혁파의 이 원리는 어떤 점에서는 당시까지의 유럽 기독교에 심대한 문제제기를 한 것이고, 이로 인한 갈등과 조정이 종교개혁사의 본질적인 측면을 구성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차츰 풀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이미 존재하고 있던 어떤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는 것, 그러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은 단지 어떤 공동체에 출석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며, 그것이 교인이 되는 모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최초에 그 교회를 세운 사람들은 어떤 '종교'를 실현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 뒤에 온 사람들은 그 종교에 참여하기로 한 셈입니다.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할 생각으로 그 '종교'에 참여하기로 했는지는 정말이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대개의 경우, 어떤 개인도 그 교회에 출석할 것인지 출석을 그만둘 것인지를 선택할 수는 있더라도 그 교회의 내면에 있는 실체, 그 추구하는 바 즉, 그 종교를 자기 뜻대로 바꾸지 못합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교회는 누구의 것인가?-
그런데 여기에서 매우 중대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교회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교회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은 부동산 소유권 문제, 혹은 정치의 문제, 혹은 법률적 문제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각각의 접근방식은 그 질문에 부합하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은 "교회는 어떻게 성경적인 교회가 되는가?"라든지 "교회는 어떻게 하나님의 것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다뤄야 제대로 된 답변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핵심은 '방법(론)'입니다. 방법을 찾지 못한 구호는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당연하게도, 그 어떤 이상도 그 이상을 구체화할 수 있는,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실현불가능 상태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론이라는 것은, 그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교회를 이끌도록 선출된 지도자들이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들, 오류에 빠졌을 때 자신들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장치들이 근본적인 중요성을 갖습니다. 이러한 안전장치가 없다면 그 교인들과 중직자들은 기필코 오만방자한 행태들을 벌이고 말 것입니다. 오만방자한 무리들을 어떤 개임의 힘으로, 주장으로,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오류이며, 교만일 수 있습니다.
좋은 교회를 만나는 것은 좋은 신자가 되고 싶은 우리의 열망입니다. 그런데 좋은 교회가 존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요소들을 갖춰야 좋은 교회인 줄을 알 수 있고, 또 그러한 요소들을 갖춰 좋은 교회로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뉴스레터에서는 이에 대해
"좋은 교회의 조건"이라는 제목으로 좀 더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