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제가 속한 교단 즉,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에서 격월간으로 발간하는 <뱁티스트>라는 정기간행물 통권 제191권(2024년 11-12월) 124쪽~134쪽에 게재한 필자의 글입니다. <뱁티스트>사는 인권문제에 관련하여 매호 2편씩의 기고 글을 싣는 데, 필자도 연초부터 기고해왔습니다. 2024년 9월 16일부터 18일까지 강원도 정선에서 개최된, 기독교한국침례회 제114차 정기총회에 참여하였습니다. 교단 정기총회 참석 후기를 '인권 문제'와 관련하여 작성해보았습니다.
그 글을 이 레터를 통해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혹여, 지적해주시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기탄없이 지적해주시기를 소망합니다.
-------------------------------------------------------------------------------------------
교단 정기총회, 만국통상규례 그리고 인권
지난 호에서는 독일종교개혁의 역사 및 그 신학을 관통하는 중심축을 ‘인권’ 개념을 통해 살펴보았다. 그 접근방식을 이번 호에서는 프랑스에 적용하고자 했었다. 독일이 프러시아 역사와 근대 자유주의 신학의 발상지로서 특이점을 가졌다면 프랑스는 반동종교개혁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리고 근대 유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프랑스 대혁명 때문에 각별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2024년 7월 26일부터 8월 11일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하계올림픽의 개막식은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 분석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지난 9월 9일부터 3일간 강원도 정선에서 열린 우리 교단의 제114차 정기총회는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하여 복기하고 검토해야 한다. 따라서 제114차 정기총회 전체가 아니더라도 정기총회 회무를 처리할 때 노출된 몇몇 중요한 지점을 ‘인격’ 혹은 ‘인격권’이라는 관점에서 의미있는 부분만이라도 발췌해서 다뤄보고자 한다.
인권(人權) 혹은 인격권(人格權) 즉, 사람이 사람됨을 자각하고 사람다운 삶을 살아낼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은 역사발전의 중심축이며, 모든 사람이 반드시 갖춰야 할 가치관이다. 그 까닭은 인류의 역사발전 동력 및 그 동력을 형성케 하고 이끌어가는 신적 섭리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는 복된 가정생활과 사회 발전뿐만 아니라 교단 발전을 가늠하는 통찰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가 된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옛 계명과 새 계명으로, 혹은 율법과 믿음으로 구별할 수 있지만 성경을 실질적으로 양분하는 원리가 아니다. 바울이 율법을 몽학선생에 비유했다. 사람이 장성한 뒤에는 몽학선생의 그늘에서 벗어난 자유한 사람이 된다고 설명했다. 이 설명에서, 몽학선생이 필요한 까닭은 미숙했기 때문이고, 불필요하게 된 것은 충분히 성숙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며, 몽학선생이 가르친 원리가 성숙과정을 거쳐 내재화된 까닭이지 전적으로 불필요한 원리가 된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무엇에 필요한가에 대한 전환적 통찰이 필요하다. 율법은 개인의 영적 회심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이 아니다. 개인의 영적 체험보다는 그 개인이 가족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공동체, 나아가서는 사회와 국가에 결합한 한 지체(member)로서 충분한 역할을 하는 법을 배우는 방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공동체를 유지하고 지속적으로 발전시킴으로써, 그 자신과 자신의 가족 그리고 후손들의 복지에 기여하는 비결을 익히는 것이다. 물혼, 신자들의 결합체를 구성하는 것이므로 ‘믿음’이 그 토대이고 그 믿음은 성숙해야 하는 것이며, 믿음의 영적 질서를 현실에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구현되는 그런 믿음이어야 한다.
이런 원리를 이미 모세를 통해 유사제도로 확립되고, 사사시대에는 사사(혹은 판관)제도로, 유다의 4대 왕 여호사밧 시대에는 각 성마다 설치운용한,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중심으로 한 재판제도로 발전했다.
어떤 사람이 부자가 되고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 합당한, 선한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합당치 않은, 악한 방법이다. 사람이 선한 방법을 선택하든 악한 방법을 선택하든 하나님께서 깊이 살피시고 반드시 정확하고 정의롭게 평가하시고 그에 따른 결과를 감당케 하신다. 이스라엘 족속의 흥망성쇠, 부강해지는 것과 쇠망하는 것의 근본 열쇠는 진실무망하고 불의한 이익을 멀리하는 인물을 배출하는 것에 있으며, 그 요체는 약하고 의지할 데 없는 이의 인격권을 부강하고 유력한 이들과 평등하게 보장하고 폭력에 시달리지 않으면 억울하지 않게 하는 것에 있다. 이 원리가 율법의 근본바탕이며 율법의 생활화는 이 원리를 완전하게 구현하는 것이다. 이 원리를 현실 세계에서 구현할수록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 성취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자신의 비전으로 삼고, 자신의 왕국이 이러한 ‘나라’로 만들고자 했던 최초의, 유명한 군주가 8세기 후반,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혹은 ‘카롤루스 대제’라는 인물이다.
중세사회가 비록 게르만족의 야만적 유습을 받아들여 봉건체제였지만 그 야만성을 단지 교회가 전하는 ‘믿음’이라는 것만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으로는 교회가 제공한 ‘교육’과 체계적인 ‘회의규칙’과 이에 따른 공정한 재판제도의 발전에 있었다. 야만의 게르만족은 교회의 지도에 따라, 원시적인 독재권력에서 ‘회의체제’의 보완에 의해 문명적인, 문화적인 민족으로 개량되어 근대국가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 변화의 속도에 따라, 민주화의 상대적 우열에 따라, 국가발전의 속도와 우열이 나뉘었다.
이렇게 이끈 것이 유럽의, 즉 서방교회였다. 독재체제는 그 스스로 민주화된 체제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고도로 발전하는 민주적 사회체제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중세교회=교황체제=교황독재’라는 단순무식한 등식을 우리의 머릿속에서 삭제해야 한다. 어떤 형태로든, 정도의 차이가 있더라도 성경에 기반을 둔 종교는 ‘회의체제’를 유지했으며, 회의규칙을 가졌다. 회의체제가 엉망이 되고 회의규칙이 무너질 때 교회는 자정능력을 상실하고 무기력해지고 부패했다고 단언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조선이 쇄국정책을 종식시키고 개항하는 것과 동시에 선교사들이 들어와 전도사역을 시작했다. 하지만 진정한 기독교 역사는 ‘교회’를 조직화함으로써 시작된다. 조직화 됨으로써 ‘지상교회’가 되고 생명력을 발휘하는 유기체로 작동한다. 교회로서의 첫 출발 자체가 ‘회의’에 의한 것이며, ‘예배’의 존재자체도 ‘회의’에 의한 것이다. 예배공동체인 회중(會衆)은 단순히 모일 뿐만 아니라 ‘회의’를 하고 ‘회의를 통해 의사결정’하는 조직체다. 그래서 교회는 당회(堂會), 제직회(諸職會), 선교회(宣敎會), 학생회, 청년회 등을 구성한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에 근대적 회의법(회의규칙)을 도입하고 YMCA 강습을 통해 퍼뜨렸다.
감리교회의 감독정치, 장로교회의 장로정치, 침례교회의 회중정치의 밑바탕에는 기독교식 회의제도 그리고 토론문화가 있다. 이는 로마 가톨릭도 마찬가지다. 로마주교를 여러 주교 가운데 하나일 뿐인 ‘주교’이지 특권계급이 아니라고 하는 ‘갈리칸주의’이든 특별한 위상과 권력을 가진 ‘교황’이라고 추앙하든 그 밑바탕에는 ‘회의’와 토론이 있다. 그래서 교황권이 강화되어도 ‘교회회의’(혹은 공의회)가 최종의사결정 기구였다.
회의제도라는 관점에서 “교황권”의 강화는 비교적 근대에 출현했다. 교황권이 강화되기 이전의 회의제도 즉, 교황일지라도 실권력은 로마주교구를 관장하는 주교이며, 다른 여러 주교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하고, 주교들의 회의체에서도 한 구성원의 자격을 가질 뿐이고 로마주교가 특별한 존중을 받는 것은 그 상징성과 그 상징성에서 비롯되어 주교들의 명목상 대표자일 뿐이라는 것이 ‘갈리칸주의’다. 이는 중세적 발전이라고 정리해도 무방하다. 초대교회의 회의제도는 ‘회중주의’이며, 종교개혁은 ‘회중주의’를 근대적 상황에서 회복하는 것인데, 그 종결점이 침례교회의 회중주의인 셈이다.
이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산물인 ‘장로교회’와 그 장로주의 정치제도 발전에서도 확인된 사실이다. 1560년 6인의 John에서 출발한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은 ‘주교주의 정치제도’에서 순회감독제도를 시행했다가 장로주의 체제를 정립한 뒤에, 신대륙 아메리카로 건너가서는 회중주의 정치제도를 받아들여 변화를 시도했다. 20세기 미국과 한국의 장로교회는 ‘회중주의 정치제도’를 악의 씨앗처럼 간주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회중주의를 더욱 많이 받아들이고 있다. 이 때문에 장로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엄격한 장로주의’와 ‘(회중주의로)완화된 장로주의’ 사이에 일종의 노선투쟁이 일어났다.
엄격한 회중주의 교회제도와 엄격한 장로주의 정치제도의 차이를 ‘권위주의적’이라는 한 단어로 정리할 수 있지만 실제 교회회의를 운용하는 철학과 방식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
회의규칙 : (만국)통상규례(총회규약 제31조)
우리 교단의 총회규약은 장로교단의 ‘헌법’의 역할을 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 총회규약의 마지막 조문인 제31조에 “본회의 의사 진행 및 미비된 사항은 만국통상 규례에 준한다”라는 문장에 따르면 총회규약은 총회의 의사규칙이라고 받아들여도 과도히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 문장에서 “만국통상 규례”는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교회에, 그리고 YMCA를 통해 한국사회에 ‘(만국)통상회의법’이라는 명칭으로 소개된 ‘로버트 회의규칙’을 가리킨다.
대개 ‘로버트 회의규칙’으로 알려진 근대적 회의진행법을 정리하여 저술로 출간한 사람은 미국 육군 장교인 헨리 마틴 로버트(Henry Martyn Robert, 1837-1923)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로버트의 아버지 조셉 토마스 로버트(Joseph Thomas Robert)가 노예제도에 반해한 탓에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에서 살다가 오하이오 주로 옮겨갔으며, 모어하우스 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목사였다.
헨리 마틴 로버트는 육군사관학교를 1857년에 졸업하고 공병장교로 복무했다. 자신의 예하 장교들이 회의진행을 엉망으로 진행하는 것을 보고 ‘회의규칙’을 정리하여 보급하기 시작했다.
육군 소령이었던 1876년 2월에 S. C. Griggs & Company 출판사를 통해 첫 출판을 했고, 그 해 7월에 제2판을 출간했다. 제2판을 출간할 당시에는 소령이었으나 곧 중령으로 승진했다. 1893년에 제3판을 출간할 때는 대령이었으나 곧 장군으로 진급했다.
초판부터 제3판까지는 ‘Pocket Manual of Rules of Order for Deliberative Assemblies: Robert's Rules of Order’라는 명칭으로 출판했다. 그러나 제4판(1915)부터 제6판(1950, 75주년판)까지는 ‘Robert's Rules of Order Revised’라는 명칭으로 이름을 수정하여 출판했다. 제7판(1970)부터 최신판인 제12판(2020)까지는 ‘Robert's Rules of Order Newly Revised’이며 약칭으로 RONR이라고 표기되는 데 이는 ‘로버트 의사규칙 최신판’이라는 뜻이며, 회의 도중에 의사규칙에 대해 참조할 때 사용하는 명칭이다. ‘NORN 100쪽 17번째 줄에 따르면~~’이라고 말하면 되고, 이에 반대하는 발언자가 ‘NORN 120쪽 25번째 줄에 따르면~~’하다고 반론을 제기하는 식이다.
로버트 의사규칙의 영향력은 심대하여 미국 각 주의 의회는 물론이고 연방국회의 회의규칙, 대한민국 국회, 도의회, 시의회의 회의규칙(회의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경우에는, Pariamentarian을 네이버 사전을 참조하면 “(경험 많고 노련한)국회의원”을 가리킨다고 설명하지만 회의규칙에 관련해서는 ‘회의법 전문가’라는 뜻이 있다.
우리 총회규약 제31조에 “본회의 의사 진행 및 미비된 사항은 만국통상 규례에 준한다”라는 조문이 삽입된 배경은 총회규약 자체와 마찬가지로 미국 남침례교회의 방식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미국 남침례교단 홈페이지에는 의사규칙을 명확하게 정리하여 공시한 문서집이 있다(https://www.sbc.net/about/what-we-do/legal-documentation/bylaws/). 이 주소를 클릭하면 모두 36개 절목의 제목이 나열되어 있는데 ‘11. Parliamentary Authority and Parliamentarians’을 클릭하면 아래와 같이 펼쳐진다.
그 첫 문장의 내용은 미국 남침례교단 총회는 로버트 의사규칙 최신판을 준수해야 한다는 규정이다. 우리 총회[교단]는 총회규약에 미비된 사항을 ‘만국통상규례에 준한다’라고 규정하였지만 미국 남침례교단에서는 총회규약 그 자체에서도 해석에 충돌이 일어나거나 모순이 발견될 때에도 ‘로버트 의사규칙 최신판을 따라 해결한다’라고 적극적으로 규정한 것이다.
미국 남침례교단의 의사규칙 규정 제11조의 두 번째 문장은 ‘총회장은 부총회장과 협의하여 수석 회의법전문가와 차석 회의법전문가(최소한 2명의 회의법전문가)를 선임하여 의사진행에 관련한 사안들에 대해 조언을 받도록 해야 한다’라는 규정이다.
그 다음의 문장들이 무척 흥미롭다. 최소한 2명의 회의법전문가 가운데 수석(선임) 전문가는 남침례교단 총회에 걸맞은 경륜과 지식을 겸비한 사람이어야 하는 동시에 공신력을 갖춘 미국 회의법전문가 협회에서 자격증을 획득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회의법전문가)자격은 변호사 자격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고, 전혀 다른 영역이다.
총회에서 의결한 내용이 민법, 형법, 상법 등의 법규에 저촉이 되느냐만의 문제라면 변호사로 충분하다. 그러나 회의진행 과정에서 어떤 발언의 내용을 인정할 것인가? 어떤 회원이 발언하는 도중에, 그 발언을 중단시키고 다른 회원의 발언을 허용할 것인가? 도중에 끼어든 발언자의 발언이 ‘긴급동의’에 해당되는 것인가? 그 긴급동의에 대해 우선적으로 토론하고 결의를 해야 하는가? 현재 토론 중인 안건에 대해 ‘의장’이 발언할 수 있는가? 발언하면 어떻게 되는가? 회의진행을 고의로 방해하는 발언을 반복하는 회원의 권리는 어떻게 제재하는가? 무의미하게 시간을 끌며 회의시간을 헛되게 소모하는 토론을 종결시키는 방법은 무엇인가? 등등의 문제는 민법에서는 다루지 못한다.
회의진행 방법론(의사진행 규칙, 회의법)에 대한 무지가 회의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그 조직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조직은 부패하게 되고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은 일종의 법칙이며 상식이다.
법규, 그리고 규칙은 강자의 전유물이며 강자가 다수의 약자를 법규라는 올무로 얽어매어 지배한다는 말은 틀렸다. 진실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그런 현상이 나타나지만 이는 법규의 본질이 그러해서가 아니라 다수의 무지 혹은 무지하고 무기력한 자가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왕이 법을 만들어 다스리는 체제를 전제적 왕권국가라고 할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 군주 개인의 권력만으로 성립되고 운영되는 국가는 거의 없었다. 어떤 왕권도 신권(臣權)의 협력 없이는 성립 불가능하다. 균형추가 어느 쪽으로 기울었느냐가 문제였을 뿐이다. 근대에 접어들면서는 군주와 귀족집단에게서 민중(시민계급)에게로 국가권력이 옮겨갔다.
서구의 역사발전을 통찰할 때, 어떤 나라 혹은 제후국이 강대해지느냐는 것은 그 권력집단이 약자들 그리고 하층민들을 보호해줌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앞섰고 발전했느냐에 좌우되었다. 이것은 입법과 사법이 하층민들의 권익을 보호해주고 사람다운 삶을 보장해주는 쪽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결과적으로 제후의 권력이 제한되는 결과로 나타난다.
영주의 하층민들은 그 영주의 소유물로서, 그 영주의 재판이 최종적 결정권을 갖는다는, 따라서 국왕도 다른 어떤 귀족도 관여할 수 없었던 것이 중세 봉건시대의 특성이었다. 이때 국왕은 성경의 가르침,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에 대한 가르침을 근거로 ‘영장제도,’ ‘무죄추정의 원칙,’ 항소심 등을 설치하여 하층민의 권익을 보호함으로써 영주의 재판권을 제한하고 상대적으로 왕권을 높여, 강력한 왕국을 건설했다. 시민계급은 자신들과 더불어 하층민들의 권익을 신장하여 의회권력을 확립하면서 왕권을 제한함으로써 근대적 의회국가로 발전하고 결과적으로 국정운영에서 군주권을 삭제한 입헌군주제도가 나왔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생국가 미국이 출발한 것인데, 이것이 근대적인 공화제 국가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선언 그리고 대한민국의 헌법이 ‘국가의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라든가 ‘행복추구권’을 국민의 기본권이라고 선언한 것은 이와 같은 역사적 발전을 배경으로 한다.
근대 의회제도는 1295년에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1세가 국왕과 대귀족과 교회대표(대주교)이 협의하던 관례에 하급 성직자 대표, 각주에서 기사 2명, 각 도시에서 시민대표 2명씩 선발시켜 참가한 비상설기구를 설치한 데서 시작되었다. 이는 장기적으로, 국왕권력과 귀족권력이 약화되고 시민계급이 부상하는 결과를 낳았지만 잉글랜드가 선진국이 되고, 강력한 패권국가가 되고, 제국으로 발돋움하게 만드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건강한 법규의 특성과 마찬가지로 회의규칙은 기득권을 보호하고 소수 권력가들의 지배권력을 공고히 할 목적으로 만들면 부패와 타락이라는 결과를 피할 수 없다. 건강하고 좋은, 따라서 유익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법규란 약자를 보호하고 소수의 권익을 지켜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회의규칙 또한 마찬가지다.
‘회의예절’이라는 것도 있다. 회의예절을 회의규칙(의사규칙)에 포함시키기도 하지만 이는 회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몸으로 익히는 문화에 해당되는 것이기에 회의규칙에 포함하지 않기도 한다. 성직계급주의를 배격하고, 목사직을 포함한 모든 직분을 개교회 회중이 선출하며 회중의 전체회의(교인총회, 사무처리회) 그 자체가 최종의사결정권을 갖는다는 원칙을 고수하는 침례교 회중주의에서는 회의예절이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면, 회의 도중에 발언할 때에는 목사, 장로, 집사와 같은 호칭을 부르지 않는다. 교회회의에서는 교회회의체의 공식직함인 ‘의장’ ‘서기’와 같은 명칭 이외에는 ‘형제(자매)’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교단정기총회에서는 발언을 시작할 때 ‘강서지방회 진리교회 대의원 임원주’라고 밝히지만 ‘박OO 대의원의 발언은 모욕적이니 사과하시기 바랍니다’와 같이 직격하지 않는다. ‘의장, 방금 발언한 대의원의 발언은 의사진행과 관계가 없고 제게 모욕적인 것입니다. 사과할 것을 요청합니다’라고 의장을 경유해야 한다. 이런 것이 회의예절이다.
발언 도중에 다른 회원(대의원)을 하대하거나 모욕하거나 차별적인 언사를 사용할 때, 회의 내용과 관계없는 문제를 거론하거나, 부적절한 언사를 사용하여 발언을 할 때 의장은 이를 제재하고, 그 발언자에게 이를 지적하는 동시에 사과하라고 요구하는 것 또한 회의예절에 속한다.
부적절한 발언을 한 뒤에 지적을 받은 발언자가 자신의 발언을 삭제해달라고 할 때, 의장이 직권으로 서기에게 발언을 기록에서 삭제하라는 것 역시 회의예절에서 어긋나는 것이다. 이 역시 동의와 재청을 받고 (착석대의원) 과반수 결의에 의해서만 삭제할 수 있는 것이니 의장은 반드시 회중(대의원들 전체)에게 물어야 한다. 묻지 않는 것은 회중의 권한을 무시한 것이며 회중을 모독하는 셈이다. 이런 것이 회의예절이니 예절을 준수한다는 것은 약자의 권익을 보호하면서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약자가 자신의 권익을 확보하고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는 법규를 비롯하여 회의규칙을 명확하게 수립하고 보완하며 철저하게 준수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의장 : Master인가? Mediator인가?
기독교 교회에서 성경적 교회관을 갖출수록 교회회의는 엄숙한 예배의 하나로 간주된다. 정규적인 즉, ‘예식’으로서의 주일예배에서 ‘삶’으로의 예배로 이어지는 첩경에, 교회에 교인들이 사업을 협의하는 각종 ‘회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주일예배가 얼마나 경건한가라는 관점만이 아니라 그 교회의 각종 회의를 얼마나 경건하게 진행하는가 역시 그 교회의 경건성을 가늠하는 매우 중요한 판별점이 된다.
감독정치와 장로정치에서 개교회의 목사는 노회에 적을 두고 있는 (목사)장로로서 개교회에서 파송되어 신자들을 지도하고 감독하는 역할을 한다. 회중주의 요소가 결합하면서 파송방식에 개교회 회중의 선출제도와 결합하게 되었다.
이런 방식에서 개교회의 중요한 회의채 즉, 당회와 제직회 그리고 공동의회(사무처리회)의 의장은 당연직으로서, 노회가 인준한 담임목사(위임목사)가 차지한다. 담임목사(위임목사)가 개교회의 당회장, 제직회장, 공동의회 의장이 되며 담임목사가 인정하지 않는 모든 회의 및 그 회의결과는 불법이며 무효가 된다. 그런 점에서 권위주의적이다.
감리교회와 장로교회에서 ‘목사직’은 권위주의적 원리에 입각하며 , 그 권위는 그 목사가 담임사역을 하고 있는 개별교회(개체교회) 회중 그 자체에서 나오지 않고 그 개별교회가 소속된 ‘노회’(혹은 지방회)에서 나온다. 회중은 노회의 판단과 결정에 의해 ‘교회’가 되기도 하고 교회가 안 되기도 한다. 따라서 회중은 노회의 지시, 감독, 처분을 받는 하위계층일 뿐이다. 교회의 여러 직분은 성직계급의 일부가 된다. 회중 혹은 하층계급의 권익은 상급기관이 베풀어주는 은택이다. 아래로부터의 혁신은 거의 불가능하다. 대를 위해 소가 희생해야 한다는 격언은 언제나 진리인 체계다.
침례교회의 회중주의, 그리고 성경적 회의질서는 이와 철저하게 다르다. 기본적으로 약자 한 사람의 권익을 최대한 보장해주는 원리를 발언권, 표결권, 선거권, 피선거권이라는 개념으로 정립하고 발전시키며, 회의규칙으로 정립해왔다.
권위주의 체제에서 ‘의장’은 그 회의체의 ‘주인’(master)이며 지배자이며 의사결정권자이다. 대표적인 것이 군대에서의 회의체다. 이 회의체는 사령관과 그 휘하의 참모들이 모여 논의하는 것인데 의사결정권자의 결단을 각 분야별 참모가 보좌한다. 감리교회 혹은 장로교회의 교회회의는 본질적으로 이런 방식이다. 차이가 있다면, 감리교회는 감독(bishop)과 감리사(superintedent)를 정점으로 하는 회의체가 구성된다. 감리교회에서는 감독들이 하나의 감독회의를 구성함으로써 하나의 교단이 된다. 교단의 차원에서 볼 때 어느 한 교회, 어느 한 교인의 목소리가 차지할 자리가 없다.
장로교회는 목회장로와 치리장로로 구성되는 회의체 자체가 권위를 갖고 있으며 회의체는 수직적으로, 당회와 노회와 총회 이렇게 삼단계로 구성된다. 개교회는 당회를 구성하도록 노회로부터 허용되어 그 노회의 구성원(a member)이 되고 노회는 노회 단위로 총회의 구성원이 됨으로써, 전체 장로교회들이 하나의 교단을 형성한다. 장로주의 정치체제에서 약하고 작은 교회, 한 사람의 교인이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점에서 감독주의 정치체제와 다를 것이 없다.
침례교회가 취하는 ‘회중주의’는 이런 점에서 전적으로 다르다. 사람들은 다른 어떤 누구, 기존의 어떤 교회 혹은 기관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결단하여 ‘회중’을 구성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 회중을 구성하고, 회중 스스로 목사를 비롯한 직분자를 선임한다. 어떤 누구도 당연직으로 교회를 대표하지도 교회의 회의를 주관하지도 못한다. 회중이 스스로 정한 규칙 이외의, 교회 밖의 어떤 법규를 그 회중에게 강제할 수도 없다. 어떤 권위자의 자문 혹은 조언도 그 권위자가 갖는 권위 때문에 그 회중에게 권위있는 것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그 회중이 자체의 결의에 의해 받아들이기로 할 때 비로소 받아들여진다.
그 회중 스스로 자신을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인물’을 그 직분과는 상관없이 선출하여 정기(임시)총회에 파송하여 그 회중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게 한다. 침례교단은 ‘가입교회’로 구성된다. 정기총회는 모든 가입교회가 대표자(대의원)을 파송하는 것으로 형성되고, 모든 대의원은 자신을 파송한 회중의 입장을 호소할 수 있고, 표결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침례교회 및 침례교단은 감리교단이나 장로교단과 철저하게 다르다.
16세기 유럽 종교개혁이 마틴 루터 혹은 존 칼빈에게서 시작되었고,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이 존 낙스를 포함한 여섯 명의 존에 의해 시작된 것이라는 인식이 옳다면, 침례교회가 취하는 회중주의 방식이야말로 종교개혁을 일으킨 방식이며, 종교개혁을 담지하는 원리인 것이다.
의장의 직분 및 권한을 회중주의 원리에 가장 부합하게 이해하는 개념이 ‘메디에이터’ 즉, 중보자 개념이다. 의장은 그 회의의 구성원들 즉, 교인들 혹은 대의원들을 지배하는 권력가가 아니라 하나님과 구성원들, 그리고 구성원들이 스스로 하나가 되도록 ‘중재’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직분이다.
감독정체 혹은 장로정체에서는 위임목사가 그 교회회의 장이 되고, 총회장이 당연직으로 ‘총회의장’이 된다. 개념적으로, 이런 방식에서 의장권을 박탈하거나 의장을 교체하는 것은 그 당사자에게는 모욕이 된다. 하지만 회중주의 회의방식에서 의장교체는 회의진행의 효율성에 따라 가장 적임자를 선출하는 것에 불과하다.
현안으로 논의 중인 안건에 대해 의장이 발언을 할 때에도 회중(대의원들)의 허락을 받아야 자신의 의견을 발표할 수 있고, 일단 의견을 표명한 뒤에는 그 안건이 처리될 때까지는 의장직을 수행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의장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도록 회중으로부터 허락을 받은 때에는 먼저, 의장권을 대리자(대개, 부의장)에게 넘겨준 뒤, 회원석으로 내려가 회원(대의원) 자격으로 발언해야 한다. 이것이 회의예절이다.
표결 : 종다수, 과반수, 2/3 이상.
근대 회의법에서는 무엇인가를 맡길 인원을 선발할 때에만 종다수 즉, 의결정족수와 무관하게 1표라도 혹은 1표라도 많이 얻은 사람을 뽑는 표결방식이다. 이는 회의의 진행속도를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보통의 안건은 과반수로 결정하도록, 그리고 규칙이나 특권에 해당되는 사안은 2/3 이상 찬성표를 얻도록 규정되어 있다고 이해하면 간단하다. 개회정족수를 규정하는 까닭은 전체 재적인원에 비해 턱없이 적은 소수가 모여 의결했을 때 그 조직공동체가 논란에 휩싸이고 아무 일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경험칙 때문이다. 회의체에서 어떤 의견은 단지 어떤 주장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이 조직공동체가 어떤 분명한 방향으로 구체적인 무엇인가를 하자고 결정하는 것인데 실제로 그 결의를 실행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대자’가 절반 이하여야 하고, 찬성자가 절반을 넘어야 한다는 원리 때문이다.
따라서 과반수 표결원칙을 ‘절반이 넘는’ 당파가 집행권력을 갖는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의 이면에는 반대자들의 세력이 찬성자들의 의도를 좌절시킬 힘이 부족하다는 불편한 진실이 놓여있다. 과반수 득표의 원리를 사용하되, 반대자들에게 인위적으로 2배의 가중치를 주었을 때 2/3 이상의 찬성표를 얻었을 때 과반수 득표가 된다.
이러한 의결정족수 방식의 밑바탕에는 반대자, 이의제기자를 최대한 반영하고 그 반대의견을 존중한다는 원리, 약자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원리가 놓여있다.
1295년에 에드워드 1세가 소집한, 잉글랜드 왕국의 모범의회(模範議會, Model Parliament)는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군대와 총포로 치르는 전쟁을 ‘의사당’ 건물 안에서 일정한 규칙을 갖고 ‘언변’으로 하는 전쟁으로 바꾸면서도 이질적인 이익집단들을 하나로 묶고 공통의 목표를 추구하는, 근대적 국가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 그것이 국가이념으로서의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의 개념임에 틀림없다. 교회 및 교파도 이와 같은 원리를 따라 발전해왔다. 따라서 이 땅의 침례교회가 발전하고 국가와 사회를 변혁시키는 원리는 이미 우리 침례교회의 이상과 주장, 그리고 총회규약에 담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