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09]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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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주는 자를 위해 한다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일한다. 돈을 벌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고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 그리고 노후를 대비할 수 있다. 이 법칙을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죽은 인간' 밖에 없다. 물론, 품격있는 죽음을 위해서도 상당한 액수의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람은 존재하는 동안에는 돈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혹은 그렇기 때문에, 돈은 상당한 문제를 일으키는데, 어떤 점에서는 돈 그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
첫 번째 문제는 '돈'의 실체에 있다. 좋은 물건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물건 자체가 돈이 아니다. 주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을 '주식부자'라고 하는데, 경제학 원리에서 주식은 '재화(財貨)'에 포함되어 있고 '돈'이라고 생각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돈'이 아니다.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권리증서'라고 생각하면 된다. 주식을 돈으로 바꿀 때 얼마를 받을지는 실제로 바꿔봐야 안다. 자고 일어나니 휴지조각이 되는 수도 있다.
농부가 가을에 많은 수확을 얻었다고 그 수확물이 곧 돈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돈'과 바꿔야 '돈'이 된다. 정보에 어두우니, 차떼기 밭떼기 하는 업자들에게 넘기는 것이 손쉬운 일이지만 피와 땀, 심지어 목숨과도 바꾸면서 거둔 수확물을 헐값에 팔아넘기는 억울함을 피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돈을 잘 벌기 위해서는, 자기에게 있는 재능이든 물건이든 뭐든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기술'을 갖추고 그 기술을 적당한 타이밍에 적절하게 발휘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확보한 '돈' 즉 '재산'이 소리없이 없어지지 않도록 지킬 수 있는 정보력과 실력을 갖추고 필요할 때는 언제든 그 기량을 발휘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의 기량만으로는 돈의 힘을 이길 수가 없다. 사람은 결단코 맘몬을 이기지 못한다. 돈의 힘만이 돈의 힘을 상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 편이 되어줄 수 있는, 나를 위해 줄 수 있는 "돈"이 나를 찾아와야 한다.
여기에서 두 번째 문제를 만난다. 나는 어떤 돈을 좇을 것이며, 내게 돈을 줄 자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다. 직장을 구할 때, 혹은 동업자를 구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내게 '월급'을 주는 사람은 선량한 사람인가? 정당한 사업을 하여, 정당하게 돈을 잘 벌고, 직원들에게 정당하게 임금을 지급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악덕업자인지를 반드시 확인할 것이다. 피묻은 돈을 가리지 않는 사업주가 자기 직원을 진정 사람대접을 할 것이며, 진심으로 아껴줄 것인가? 언제까지?
성경은 악한 돈, 악한 권력, 악한 관계를 좇지 말라고 가르친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가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나쁜 돈을 삼가고, 착하고 좋은 돈을 기다리고, 좋은 돈을 좋게 사용할 줄 아는 좋은 사람이 되는 그것이 참된 경건이라고 가르친다.
단순히 착한 사람이 아니라 "굳셈"을 갖춘 "착함"이어야 한다. 굳세지 못한 즉, 허약한 착함만 있는 사람은 '유혹'을 견디지 못한다. 나쁜 돈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나쁜 돈의 힘을 이기지 못한다. 좋은 돈을 쥐고도 결국, 나쁜 짓을 하게 된다. 그 성품을 악의 구렁텅이로 끌고 들어가는 악한 힘을 뿌리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계시를 통해, 우리의 성품을 바꿔주시는 일부터 시작하신다.
하나님은 분명코 우리에게 "감당할 시험만 주신다"라고 선언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을 억지로, 고난에만 국한시킨다. 틀린 해석은 아니다. 하지만 범위를 너무 좁혔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문맥에서 보자면, "돈의 힘"을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우리에게 돈을 주신다는 의미 역시, 그 말씀에 포함되어 있다.
좋은 돈을 받았는데, 돈을 준 자를 위해 일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이것을 배신이라고 한다. 내 자식이 병이 들었고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희귀한 약이 있다고 가정하자. 어떤 의사가 그 희귀한 약을 구할 수 있는데 돈이 문제라고 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막대한 돈을 마련하여 그돈을 건넸다. 그래서 그 의사가 약을 구했는데, 그 약을 내 자식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투약했다고 가정하자. 어쨌든 환자를 치료했으니, 그 의사를 의사의 본분을 다한 좋은 의사라고 할 것인가? 그 의사가 다른 사람에게 투약하는 댓가로 웃돈을 받았다면 그 돈은 좋은 것인가? "돈"은 죄가 없으니 그 "돈"은 깨끗한 것인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죄악을 심판하실 때, 하나님은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하실까?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약 5:3).
오해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주신 돈은 축복인데, 악하게 사용될리가 없다. 말세에 말씀을 무시하고 지혜가 없고 탐욕스럽게도 악한 돈을 쌓아두었으니, 그 악한 돈의 '악'이 증거가 되고, 그 악한 돈이 나쁜 돈을 사랑한 자들의 살을 파먹게 하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야고보를 통해, 이런 무서운 말씀을 신자들에게 하시는 것일까? 왜?
목사가 말씀만 설교한답시고, 성경 글자만 들여다보게 만들고 교리만 따지게 만들면서 결국, 신자들을 어리석게 만드는 경우가 정말 많다. 진짜 어리석은 것은, 목사가 교인들로부터 돈을 받으면서 교인들을 위해 설교하지 않는데도 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목사가 목사 자신을 위해 설교하고, 부유하고 권력있는 자들을 위해 설교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가난한 성도들의 눈을 열어주고 지혜롭게 하여 자신의 권익을 지키는 선량한 방법을 깨닫고 실천하게 하는 방향으로 설교하지 않고, 오히려 정반대로 설교를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런데도 감미로운 말솜씨에 속아서 은혜로운 설교, 말씀에 충실한 설교라고 착각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어리석음이다.
19세기 중반 무렵의 미국 개혁주의 신학을 예로 들어보자. 백인 농장주인의 기준에 만족스러운 개혁주의적 설교를 그 농장의 흑인노예들에게 설교를 한다고 가정하자. 이 개혁주의는 살게 하는 개혁주의일까? 죽게 하는 개혁주의일까? 더욱 비참한 경우란, 백인 농장주가 세운 교회가 아니다. 노예해방이 된 이후에 흑인들만 모여 세운 회중에서, 흑인 설교자가 백인 칼빈주의 신학에 철저히 입각한 설교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
만일 칼빈주의 신학은 가장 올바른 신학이며, 진리를 가장 충실하게 담은 체계이며, 그만큼 초월적이며 보편적이기 때문에, 회중의 구성성분과 같은 세상적인 차원을 초월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면, 어째서 예수께서 사람의 형상을 입고 세상에 오셨고, 어째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으며, 어째서 땅에 세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지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성도들의 돈으로 먹고 입고 살면서, 바로 그들의 삶을 배반하는 설교는 아무리 감미로워도 그 실체는 독약에 다름 아니다.
목사를 먹이고 입히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할지라도 성도의 피와 땀과 눈물을 통해 먹이고 입힌다는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배은망덕을 용서치 아니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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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교회, 그리고 성경적 헌금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라는 정밀한 체계를 이룬 것은 18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만큼 막강해졌다는 뜻이다. '돈'이 인격을 갖출 수 있게 된 것은 대단히 오래 전이지만 그 인격체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전지구적 패권을 갖게 된 역사는 비교적 짧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1970년대의 고도성장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를 굳히기 시작했고, IMF 구제금융을 계기로 자본주의 세계질서에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교회가 아주 큰 실수를 한 것은 교회의 재정관리를 "금융기관 종사자"에게 맡긴 것이다. 자본주의적 재정관리가 몸에 밴 사람들의 안목으로 교회재정이 관리되기 시작함으로써, 한국교회의 자본주의화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가속화되었다.
성경이 가르치는 '성결'을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신자에게 "성결한 삶"을 가르치고 성결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진짜 믿음"을 굳세게 하는 도리를 가르치고, 몸에 익히도록 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성결은 우선 믿음과 연단으로 시작한다. 믿음과 연단을 충분히 겪으며 집사가 된 이들이 재정을 맡았을 때 한국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도성장과, 국토개발이 전국을 휩쓸고 시대를 이끌어가면서 한국교회가 수량적으로 급성장을 하면서, 교회의 재정관리에서 믿음은 사라지고, 자본주의 재정원칙에 따른 예산-결산의 수지를 맞추는 것이 사명처럼 되었다. 여기에 교회는 믿음의 가치로 평가되지 않고 부동산으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교회성장(학)이라는 아름다운 이름 뒤에는, 부동산 투자의 안목이라는 자본주의 기술이 숨어있었다.
자본주의 철학이란 '돈'에게 인격을 부여하고 권력을 부여하고, '돈'으로 사람의 계급을 구분하고 것을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철학이다. 다시 말하자면, 돈이 사람을 고용하고 월급을 주는 것이 정당하다는 철학이며, 돈이 온갖 나쁜 짓을 해도 결코 처벌받지 않는 세상이 좋다는 철학이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는 극과 극처럼 멀고 서로 상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철학이 교회에 파고들어왔다. 그 결과를 우리는 지금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한국교회 특히, 대형교회는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이 계셔야할 자리에 '돈'이 앉아 있다. 자본주의가 돈에게 인격을 부여했다면, 한국교회는 신격을 부여했다. 교리공부를 아무리 해도 '돈'이라는 신은 물러가지 않는다. 그 위세가 꺽이지도 않는다.
장로주의, 회중주의, 감독주의를 말할 때, 각 정치체제의 본질을 가장 쉽게 파악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교회에 어떤 돈이 어떻게 들어와서 어떻게 흘러나가는지를 누가 파악할 수 있고, 관리할 수 있으며, 누가 그 흐름을 중단시킬 수 있느냐를 보는 것이다. 한국사람이기에, 장로교회를 다니든 침례교회를 다니든 결국 비슷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2020년대에 들어선 지금, 어느 교파 교회나 개교회를 살펴보면 비슷하지만 여전히 교회체제에 차이가 있다. 나는 여기에서는 두 가지만 말하고 싶다.
첫째, 블링블링한 건물을 가진 교회치고 상시적으로, 누구에게나 재정현황을 공개하는 교회가 없다. 평상시에 단지, 교인이라는 자격만으로 교회재정 현황을 밝히라고 요구할 수 있는 교회체제는 회중주의뿐이다. 양심적으로 교회재정 특히, 부채현황을 밝히던 교회가 있었다. 따라서 양심적인 교회, 건전한 교회라고 알려졌으나 블링블링한 교회건물을 마련하더니 재정보고 특히, 채무보고가 없어졌다.
왜 그런가? 어느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면 교인들이 교회에 다니는 목적이 '교회채무 상환"을 위한 것 이외에는 다른 목적은 단지 허울뿐인 상황이 된다. 이 정도 상황이면 그 교회는 더이상 교회의 목적을 수행할 수 없게 된다. 맘몬의 노예에 다름 아니다. 그 교회의 존속을 위해 열심히 돈을 벌어 헌금한다고 하지만 결국 그 돈은 은행권으로 흘러들어간다. 그 과정에서 그 교회의 담임목사를 비롯한 리더십은 '돈'을 가장 많이 생각하는 존재로 탈바꿈된다. 그리고 머잖아 맞이하게 될 은퇴 이후의 삶을 대비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품게 된다. 그런 심장에서 무슨 참된 은혜의 말씀이 나올까? 불가능한 일이다.
성도는 "어떻게 헌금을 해야할까? 혹은, 얼마를 헌금해야 좋을까?"를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하지만 애써 고민해야 하는 것은, "나의 헌금은 얼마나 정당하게 사용될까?" 아니, 어떤 점에서는 성도 각각은 "우리 교회의 헌금수입은 얼마나 정직하고 거룩한 돈이며, 얼마나 정직하고 거룩하게 헌금을 사용할까?"를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성경적 헌금이다.
입에 들어가는 음식을 깐깐하게 따지 않으면 건강을 잃는다.
교회재정을 깐깐하게 따지지 않으면 거룩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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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 그리고 젤렌스키의 돈
인터넷 특히 구글 검색창에 "젤렌스키"라는 이름과 "재산"이라는 단어를 함께 넣고 검색하면 놀라운 결과가 나온다.
만 1년을 넘긴 전쟁통에 우크라이나 전국토가 쑥대밭이 되었고 젊은 병사가 10만명을 넘긴 나라의 대통령이 "목숨을 걸고 침략자 러시아 군대"에 맞서 싸우는데, 한달에 받는 월급이 미화 78만달에 달하고, 연수입이 1억 1천 3백만 달러라고 한다. 영국의 권위있는 언론매체 BBC에 따르면, 2022년 11월 기준으로 1년 동안 새롭게 늘어난 재산이 1조원이란다.
젤렌스키는 원래 코미디언이었다. 재산을 불리는 귀재를 갖춘 투자전문가가 아니었다. 게다가 나라가 숙대밭이 되는 전쟁통에 어떻게 재산을 1조원이나 불릴 수 있을까? 그리고 BBC는 젤렌스키가 200억달러를 횡령한 사실을 발견했다고 보도한다.
우크라이나가 원래 엄청난 부자나라였던가? 아니다. 유럽의 빵바구니였지만 대부분의 국민은 가난했다. 전쟁 전에는, 돈바스 지역주민들이 벌어들인 돈으로 나라 살림을 꾸려나가는 형편이었다. 돈바스 지역을 러시아 군대에게 빼앗긴 지금, 우크라이나 정부를 지탱하고 있는 공무원 월급은 미국이 대주고 있다. 이런 실정에서, 젤렌스키와 측근들은 어마어마한 부자들이 된 것이다.
사실, 놀랍지도 않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일어난 거의 모든 전쟁은 "돈" 때문에 일어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알렉산더는 왜 동방원정을 떠났는가? 젊은 나이에 왕이 된 알렉산더는 가난한 나라 마케도니아를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기 위해 정복을 시작했다. 잘 살기 위한 방법은 그것 뿐임을 알렉산더의 아버지 필리포스는 진즉에 간파하여, 아주 특별한 군대를 오랫동안 준비시켰고 알렉산더를 전쟁기계로 육성했던 것이다.
알렉산더는 '돈'을 좇아 동방으로 원정을 했고, 승전을 통해 거둔 '돈'은 알렉산더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었다. 더욱 강력해지면서 더욱 멀리까지 정복한 알렉산더는 막대한 '돈'을 마케도니아로 보내 조국 마케도니아를 블링블링하게 만들었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알렉산더 제국이나 후대의 로마제국이 잔혹한 침략과 약탈을 일삼았는가 하면 실제로는 (그리고 상대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봐야 한다.
알렉산더의 군대, 로마제국 군대가 상대한 군대는 동방제국의 주민들로 구성된 군대가 아니다. 거의 대부분 돈을 받고 전쟁을 대행하는 용병들이나 노예군단들이었다. 현지인들이라고 해도 귀족 혹은 무사계급에 속한 이들이었다. 알렉산더 혹은 로마제국은 착취와 약탈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통상/무역 및 안전보장을 확대하였고, 이로 인한 세수의 증대를 목적으로 하였다. 이것이 우리민족도 경험했던, 근세를 전후로한 제국주의 침탈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일제는 부강한 강국 일본제국을 도모하기 위한 자원으로, 우리 민족과 국토를 넘봤다. 1920년대에 맞닥뜨린 자본주의 산업화의 부산물인 극악한 빈부격차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 민족, 우리나라를 착취했다. 탐욕스러운 팽창정책에 우리 민족을 뼈채 갈아넣어 용광로에 불을 때듯 대동아전쟁에서 밑밥으로 사용했다. 얼마나 사악한가?
젤렌스키와 우리크라이나 민중, 그 운명에 대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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