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0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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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교회 :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교회
'fear'는 어려운 단어다. 이 단어를 '공포'(恐怖)라고 이해해야 할까? '두려움'이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무서움'이라고 해야할까? 그런데 성경은 '경외'(敬畏)라고 번역한다. 뭐가 옳을까?
'fear'는 영어 단어다. '공포'라는 한자말은 익숙하지만 원래 중국식 한자는 한 글자가 하나의 뜻이 된다. 심지어 하나의 문자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중국식으로 말하자면 '공'이든 '포'이든 한 글자면 된다. 그런데 우리식으로 하려고 같은 뜻의 '공'과 '포'를 붙여서 두 글자로 만든 것일까? 그런데 '경외'라는 번역은 또 뭔가?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시니 절대로 '공포'의 대상이 될 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존경하고 높여 우러른다는 취지로 '경외'라는 단어로 번역한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성경을 그 본문에서 사용된 뜻대로 번역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싶은 대로 억지로 비틀어 새로운 단어로 만든 것이다. 이것은 고약한 것이다.
더 고약한 것은 '두렵다'와 '무섭다'라는 뜻이다. '공포'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를 찾아보면 '무섭고 두렵다'라는 뜻이란다. 그렇다면 무섭다는 말은 무슨 뜻이며 두렵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무섭다는 말은 두렵다는 뜻이고 두렵다는 말은 무섭다는 뜻이라는, 동어반복을 벗어나지 않는다. 정의를 아무리 잘 읽어봐도 뜻이 판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가장 명확한 설명은 고(故) 김수업 교수의 글이다. 참고로, 김수업 교수는 우리말 연구의 권위자이며, 경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를 거쳐 대구 가톨릭대학교 총장을 끝으로 공직을 마치셨고 2018년 6월에 향년 79세로 생을 마치셨다.
김수업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두려움과 무서움은 모두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이기에 비슷한 것이다. 이런 감정은 자신이 이겨낼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이 즉,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 때문에 발생한다. 다시 말하자면, 압도적인 힘 혹은 권세 앞에서 놓인 처지 때문에 일어나는 감정이다.
그런데 그 감정의 무서움과 두려움이라는 것으로 달라지는 것은 그 힘이 내게 어떤 힘으로 작동하고 어떤 결과일지를 알면 무서움이고, 알지 못하면 두려움이다. 그런데 깊이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으니, 말로 하는 이런 설명은 알다가도 모른다. 그래서 김수업 교수가 직접 예를 들어 설명한다 :
"내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아버지에게 호된 꾸중을 들으면 무섭지만 두렵지는 않고, 무슨 까닭인지 모르지만 화가 나신 아버지가 나를 불러 세우면 두렵지만 무섭지는 않다. 깜깜한 밤중인데 마당에 무슨 기척이 있어 방문을 열고 나서려고 하면 두렵고, 마당에서 두리번거리다가 마루 밑에서 눈에 불을 켜고 쳐다보는 고양이를 보면 무섭다. 호랑이는 언제 어디서 보아도 늘 무섭고, 하느님은 언제 어디서 마음에 떠올려도 늘 두렵다."
김수업 교수의 설명이 참으로 탁월하다. 우리가 우리말을 얼마나 무분별하게 사용하는지 각성하게 된다. 그런데 마지막 줄에 "하느님은 언제 어디서 마음에 떠올려도 늘 두렵다"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이 분의 신앙의 깊이는 얕은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기도 하고 두려운 분이기도 하다.라고 기술해야 맞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분명하게 각인시켜주시고 한 것 같은데 하나님이 죄악을 얼마나 혐오하시고 얼마나 철저하게 응징하시는 지를 철저하게 기록해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분노를 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다. 하지만 그 응징의 정확한 깊이와 길이를 우리로서는 도저히 충분히 알지못한다. 최종심판과 영원한 징벌이 얼마나 고통스러울 것인지를 우리는 충분히 알지 못한다. 그래서 두려운 분이다.
'공포'(恐怖)라는 단어는 '두렵고 무서움'을 의미한다고 하니, 하나님은 '공포'이신 분이라고 이해해도 무리가 없다.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와 인애의 하나님이신데, 그런 하나님을 '공포'스러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느낀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할 때 '공포'라는 단어를 삭제하는 것은 오히려 성경에서 벗어난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라는 뜻을 찾아보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삶의 자세를 말한다"라는 것이며 "공포심이 아닌 존경하는 마음에서 갖는 두려움"이라고 정의한다(두란노 성경상식). 이 설명에서 앞의 부분은 '좋은 믿음'을 삶과 연결지어서 설명한 말이고, 뒤의 것은 동어반복이지만 '경외'라는 한자의 뜻 풀이에 불과하다. 다만 한 가지, '공포(심)'을 애써 부정하려고 한다.
신자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공포심'을 가지면 안 될까? 침례자 요한이나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한결같이 '회개하라'라고 외치셨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에 회개하라고 가르치셨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말을 '심판이 가까이 왔다'라는 말과 사실상 같은 뜻으로 쓰셨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를 겨누고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모든 나무를 내리쳐 불속에 던질 때가 가까이 왔다'라는 뜻이다. 회개를 하였든 아니 하였든, 이제 엄청난 위력으로 도끼를 내리치고 그렇게 죽인 나무를 영원한 불못에 던질 그 분을, 그 위력을, 그 분노를, 그 화염을 바라보는 심정이 '공포심'이 아니고 무엇일까?
어린양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어린양의 피를 바른 우리는 '양'일까 '늑대'일까? 심판대를 향하는 우리는 '완전한 성결'을 이미 성취하였기 때문에 완전한 구원으로 들어갈 찰나에 있는가? 아니면, 아직 완전하지 않지만 여전히 죄악된 습성과 부패가 남아 있는, 즉, 완전한 성결을 이루지 못하였지만 어린양의 보혈이 가져단 약속을 힘입어 심판대 앞으로 다가고 있는가? 이제 곧 최종선고가 떨어질 것인가?
여전히 죄로 물든 습성과 부패가 남아있다면, 그 습성과 부패가 하나님의 거룩과 위엄 앞에 공포심을 갖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하물며, 아직도 세상살이를 하고 있는 신자들과 교회는 어떨까? "믿음이란 영원한 안전이다"라는 공식을 외우고 있는 것이 신자다움, 교회다움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까?
아니면, 믿음이란 하나님의 두려워하고 무서워 하는 마음가짐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더 나은가? 성경은 믿음은 씨앗에서 시작해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장해 나가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믿음은 하나님을 무서워하고 두려워 함에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고 믿는 것"이 믿음의 전부가 아니다. 이런 식의 믿음은 위선적 믿음, 가짜 믿음일 가능성이 크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내 죄를 씻어주셨고 이제는 두려워해야 할 것이 없다고 믿는 그것이 내 믿음이라고 자부할 때, 이런 믿음은 이기심, 자기본위의 철학에 얼마나 취약할까? 얼마나 뻔뻔해질 수 있을지 상상하기도 어렵다.
놀랍게도, 불신앙이란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앙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법도를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하나님을 올바로 두려워할 줄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기에 올바른 삶을 이어가는 법도를 배울 수 있는 교회가 정말 좋은 교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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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고민스러운 질문?
날카로운 질문은 언제나 대답하기 힘이 듭니다. 그런데 그 중에 다른 어떤 질문보다, 힘든 것, 혹은 가장 힘든 질문이 어떤 조직신학 책, 혹은 교회사 책이 좋으냐는 질문이며, 책을 추천해달라는 요청이다.
청교도 분리주의자들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신대륙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 1620년이다.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이 신대륙으로 건너가 자신의 이름을 딴 대학 하버대 대학을 세운 것이 1636년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존 하버드의 유언장 작성이 1636년이고, 이 유언장의 내용이 집행됨으로써, 하버드 대학이 첫 졸업생을 배출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대략 30년쯤 뒤에, 저 유명한 존 오웬을 하버드 대학에서 총장으로 청빙했으나 존 오웬이 단호히 거부했다. 이때 존 오웬은 미국의 장로교도들이 회중파를 심하게 탄압한 일을 지적하기도 했다.
1660년대는 존 오웬의 신학이 충분히 성숙해 있을 무렵이고 이후로도 20년간 정력적으로 활동했고, 주요한 저술들을 펴냈다. 그런 점을 생각한다면, 존 오웬이 하버드 대학의 총장으로 부임했더라면 미국 신학의 역사, 영미 개혁주의 신학의 역사가.. .. 확연히 달라졌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로서도 참으로, 아쉽고 미련이 진하게 남는 역사다. 물론, 1662년 대축출의 충격적인 사건을 견뎌냄으로써, 놀라운 저술들을 우리에게 남겨주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비할 수 없이 큰 선물이기는 하다.
위 글에 대해 어떤 분이, 위 글과 관련한 책을 추천해 달라는 댓글을 남기셨다. 곤혹스러웠다. 내가 이런 질문, 그리고 역사책을 추천해달라는 요청에 답하기를 힘들어하는 까닭은 내 공부방식과 관련이 있다.
첫째, 나는 역사를 공부할 때 역사책을 정말 많이 봤다. 두툼한 한 권의 책을 정말이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반복해서 본 적도 있다. 같은 제목(주제)의 책을 책상 위에, (과장해서 말하자면) 산처럼, 탑처럼 쌓아놓고 반복해서 읽어본 적도 있다. 그것은 영어 문법책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to-부정사'가 무엇인지 몰랐는데 잘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to-부정사'를 설명하는 (구할 수 있는)모든 문법책을 구하는 대로 모두 읽고, 그 설명을 서로 비교하고, 내가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그 이해가 진짜 이해한 것인지 무엇을 놓쳤는지를 파악해 나간다. 그런 식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는, 역사책이든 영어문법책이든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를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직성이 풀리고 도저히 고칠 수 없는 고질병 같았는데, 어느새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이 가장 힘든 고역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보니 어떤 주제를 논할 때 어떤 책의 어떤 곳을 요약하고 정리하는 법이 없다. 필요한 팩트를 여러 자료를 통해 교차검증을 하고, 내가 쓰는 글의 전제에 대해, 논증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필요하다면 그에 관련한 자료를 확인한다.
그래서 최근에 어떤 좋은 역사책이 발간되었는지 잘 모른다. 잘 모르기 때문에 책을 소개하기가 정말 어렵다.
둘째, 책을 소개하기를 어려워했던 것은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강의할 때마다 첫 시간에 과목을 소개하고 필수적인 도서들을 추천해야 하는데 이 역시 어려웠다. 그런데 이 경우는 위와는 다르다.
역사공부, 교회사 공부는 교수의 입장과 학생의 입장이 다르다. 교수는 교수의 역사관을 가져야 하고, 여러 역사관을 폭넓게 소개해야 한다. 반면에 학생은 이제 자신의 역사관을 가져야 한다. 이게 문제다. 각 개인은 자신이 놓여있는 위치와, 그 위치를 관통하는 삶의 맥락에서 자신의 역사관을 가져야 한다. 교수의 역사관을 잘 배우고 익힌 뒤에, 즉 답습하여 철저히 익힌 뒤에, 학생 자신의 것을 만들어나간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교수의 역사관을 답습하는 것은 교수의 역사관에 종속된다는 것이고, 이미 확고하게 굳어진 뒤에는 독립된 자신의 역사관을 갖는다는 것이 너무 늦은 것이 통례다.
친일사관이 그래서 나쁜 것이다. 친일사관에 일단 젖어든 역사관을 가진 경우, 다른 것으로 바꿔끼울 수 없다. 친일사관을 적절하게 변형시킨다고 건강한 민족사관이 되는 것도 아니다. 처음 역사관을 형성할 때부터, 선배 혹은 교수의 역사관조차도 냉철하게 판별하면서 따져가면서, 수많은 문제의식과 부딪혀가면서 자신의 역사적 통찰을 통해 자신의 역사관을 형성해야 하는 것이다.
기존의 탁월한 저술들은, 그 저술가들의 문제의식과 역사관이 녹아있다. 세상의 유명한 그리고 탁월한 역사가들 중에, 나 혹은 우리를 위해 저술해주지 않는다. 독일의 역사가들은 "독일인"을 위해 그리고 독일을 위해 책을 썼다. 독일에서 교육을 받았고 독일에서 교수경력을 시작한 필립 샤프는 저 유명한 교회사 전집을 미국을 위해 썼다.
이것이 책과, 논문의 차이다. 논문은 그 논문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그 한계를 서두에서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책은 그렇지 않다. 다만, 학위논문을 책으로 출간한 것은 본래 논문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저술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리고 저들이 갖고 있던 문제의식, 그리고 그 문제의식을 유발했던 세상 혹은 '프레임' 혹은 '패러다임'은 지금, 4차산업혁명 시대에 진입했다고 주장되기도 하는 시대이므로, 폐기되어야 할 시점을 이미 지나친 셈이다. 이 또한 추천을 힘들게 한다.
지금은 구글 검색엔진의 시대에서, 위키백과의 시대에서, A.I 시대로 탈바꿈하고 있다. 책이 필요없는 시대가 되었다. 책상 위에 엎질러진 잉크 때문에 곤혹스러웠지만 아직 잉크향이 코 끝에 머물러 있는 그런 세대, 저물어가는 세대에 속했기에 묵향, 잉크향이 그립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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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납적 성경공부와 Q.T. : 그 정체는 무엇일까?
독일철학의 특징은 임마누엘 칸트라는 터전과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관념론'과 '변증법'이라는 두 글자로 압축된다. '변증법'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드러낸 사람이 헤겔이며 '정-반-합'이라는 세 글자로 압축된다.
역사 특히, 서양사와 교회사를 공부하면 너무나도 당연한 듯이 고대-중세-근대라는 3구분법을 사용하는데 이렇게 3개로 시대구분을 하는 방식을 독일 역사학자가 맨처음 사용하여 유행시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근대에 접어들 때까지 독일은 '1등'을 해 본적이 없었다. 모든 면에서 겨우 2등, 3등이었다. 나폴레옹이 등장하여, 유럽의 주요 지역을 폐허로 만들다시피 했고, 프랑스 군대마저 러시아로 돌진시켰다가 패망했기에, 그 파멸적 재앙에서 살짝 비껴 있었던 프러시아가 독일지역을 석권할 수 있었고, 그 독일왕국이 겨우 1등 자리를 넘볼 수 있게 되었다.
언제나 2등, 3등하다가 마지막에 겨우 1등 자리를 넘볼 처지가 된 뒤에, 교회사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독일인(German)은 언제나 탁월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결국, 독일인이 전면에 등장하여 역사를 주도하기 전에는 어둡고 문제가 많은 세상이었다.
그러한 문제, 그러한 어둠은 자연질서의 당연한 수순이었다. 정이 등장하고 반이 등장하면 정과 반이 격렬하게 다투기 마련이다. 그 시대가 지나면 '합'의 시대가 온다. 그래서 헤겔은 오늘, 어제에 속한 것들을 빨리 때려부술수록 '합'이라는 미래가 신속히 다가온다고 믿었다. 이렇게 미래가 빨리 다가오도록 만드는 것을 헤겔은 '혁명'이라고 했다.
이러한 관념, 사고방식이 마치 프라이팬에 올려진 버터가 뜨거운 열기에 스르륵 녹아서 식빵에 스며들듯이 하여 만들어진 것이 '자유주의' 신학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독일(German)이 만든 거의 유일한 신학이다. 자유주의 신학 이전의 신학은 독일 이외의 지역에서, 고대의 정통주의를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그 정통주의 신학에 반대하여, 반립(反立)한 것이 합리주의 신학이라면, 합에 해당되는 자유주의 신학이 나왔으므로, 정통주의 신학과 합리주의 신학은 폐기된 셈이다.
자유주의는 옛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보편으로부터 교훈을 도출하지 않는다. 독일인이 놓여있는 그 현실에서 교훈을 도출한다. 이것이 귀납법이다.
근대 과학은 귀납법적이고, 귀납논리는 프란시스 베이컨이 '노붐 오르가논'(새로운 논리체계)이라는 저술을 펴냄으로써 논리와 과학에서 혁명을 일으킨 그 논리라고 선전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베이컨은 연역논리를 부정하지도 폐기하지도 않았다. 다만, 연역논리로서는 시대의 요구에 충분히 부합하기 어려우니, 그 연역논리의 한 부분이었지만 잘 사용되 않았던 '귀납논리 공식'을 잘 활용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자유주의가 그 이전의 모든 신학을 지나치게 과격한 자세로 폐기하듯이, 귀납논리를 채용하여 '자유주의적 성경신학' 즉 비평학을 발전시켰는데, 이 비평학적 연구방법론을 차용하여 만든 '성경공부 방법론'이 귀납적 성경공부라는 것이다.
문제는 연역적 성경공부법을 부질없는 짓으로 매도하는 태도였다. 귀납적 성경공부를 도입한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한 '교회관' 이전의 교회를 '기존교회'라고 칭하면서 배타적인 태도를 보였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원리 및 태도는 프로이센 왕국이 자유주의를 앞장세워, 그 이전에 뿌리를 깊이 내렸던 가톨릭, 루터교, 개혁교를 무너뜨리고, 국왕과 그 통치권에 순응하는 교회를 만들고자 한데에서 이미 강력하게 자리를 잡았었다.
귀납적 성경공부가 한창 유행할 때, 그 원리를 생각해보면, 기존교회에서 배웠던 관념을 버려라, 기존교회에서 배웠던 교리를 버려라,에 다름 아니었다. 이렇게 익숙해진 뒤에, 정통주의 교리가 들어갈 틈이 없게 된다. 교리는 낯선 이방인의 얼굴로 느껴진다.
그 빈자리를 채워주는 것이 Q.T.라는 것이다. 공부라는 것은 본래 외부의 정보(지식)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내게로 들어오는 그 정보를 소화하다가 막히면 사람은 골똘히 생각에 잠기고 때로는 격렬하게 따지며 고찰하기도 한다. 깊이 음미하기도 한다. 깊이 생각하고 잠점히 생각하고 되새기고 행동하면서 검증기도 한다. 그래서 점차 알아간다.
그런대 Q.T.는 명상과 궤를 같이 한다. 명상은 외부에서 들어온 어떤 것을 붙들고 씨름하는 것과는 정반대다. 붙들고 씨름하기도 하지만 어떤 싯점에서는 흘러가게 내버려둔다. 그렇게 하나하나 머릿속에서 비우고 마음에서 비운다. 내가 의도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내 생각이 자유롭게 흘러다니도록 내버려둔다. 그런 내 생각조차 어디론가 흘러가버려도 그대로 흘려보낸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불교의 원리다. 불교는 고대 힌두교에서 나왔고, 요가라는 것 또한 힌두교의 한 종파를 가리킨다.
따라서 Q.T.를 수도원 명상법과 연계하면서 마치 고대 기독교 수련방법인 것처럼 간주하는 것은 내가 볼 때 좋지 않다. 관상기도법 또한 로마 가톨릭 수도원에서 일반저으로 사용하던 방법이 아니었다. 하다보니 어느 틈에, 힌두교 혹은 불교에서 행하던 수련법과 비슷해진 것도 있겠지만 원래 원리가 다르다.
힌두교 불교는 진리가 없는 종교다. 명상수련을 통해 진리를 보는 것이 소원인 종교다. 그러나 기독교는 진리가 나를 찾아 온 종교다. 그 진리를 들여다보고 생각해보고 뜻을 찾는 종교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고 은혜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비춰 내 모습을 아는 종교다. 그리고 변혁을 이루는 종교다.
성경을 찬찬히 읽고 밑줄긋고, 참고가 될만한 신학책 주석책을 뒤적거리며 찾다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메모하다가 토론도 하고 논쟁도 하는 것이 기본적인 올바른 성경공부 방법이다. 많이 묻고 많이 들어보고 많이 토론하는 것이 진짜 좋은 공부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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