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2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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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벧세메스의 암소 :
사무엘상 연속설교를 시작하면서
6월 셋째 주일(18일)부터, 사무엘상의 연속설교를 시작한다. 그런데 감히 '강해설교'라는 말을 쓰기는 낯이 간지럽다. 하지만 사무엘상을 촘촘히 다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계기는 단순했다. 대단한 뭔가가 있어서, 큰 결단을 내리고 시작한 것이 아니다.
지난 주 화요일에, 서울 염창역 인근에 소재한 모 교회에서 6월 지방회 월례회가 있었다. 6월 월례회 장소를 제공한 교회의 담임목사가 마침 자신의 막내아들이 전도사 시취를 받는 날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날은 간단한 간증이 아니라 뜨겁게 설교를 했다. 그 본문이 사무엘상 6장의 언약궤를 실은 암소들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벧세메스로 똑바로 걸어간 장면이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문득, 사무엘상 6장의 "벧세메스로 향한 암소들"을 다룬 설교를 듣고 싶은 데, 왜 그 본문을 설교하지 않느냐고 궁금한듯 내게 물었다. 내 기억에는 분명히 그 본문으로 설교를 했는데, 아내가 기억을 못하는 것 같았다.
'벧세메스의 암소들' 혹은 '벧세메스로 향하는 수레'는 사사시대에서 왕정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리더십의 상향조정과 관련된 중요한 지점이라는 점에서, 구약성경의 해석방식 뿐만 아니라 교회체제에 관련해서도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2008년 2월 첫 주부터 지금까지 내가 사무엘상 6장 1절에서 16절 본문을 가지고 설교한 것이 모두 세 번이다. 2009년 3월과 4월, 그리고 2017년 9월에 설교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2017년에는, 사무엘상 6장의 장면만이 아니라 사무엘상 4장의 제1차 에벤에셀 전투로부터 사무엘상 7장의 제2차 에벤에셀 전투까를 연이어서 설교를 했다. 게다가 이 설교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와 이신칭의에 대해 알고 싶다는, 요청에 따라, 주일오후에 루터와 독일종교개혁에 대해 특강을 한 이후에, 그 다음 주일부터 오전에는 갈라디아서를 설교하고, 오후에는 갈라디아서 본문에 걸맞은 구약본문을 찾아서 연속적으로, 21주에 걸쳐 설교를 했다. 오래된 탓에 잊고 아내도 나도 잊고 있었다.
17세기 잉글랜드 청교도 가운데 리처드 백스터는 당시에는 대단히 강력하고 유명한 목사였다. 잉글랜드 최고의 신학자 존 오웬과 '개혁주의 칭의론'에 관련하여 치열하게 논쟁을 하였을 정도다. 백스터가 오웬에게 신학적으로 도전하여 논쟁을 벌인 것이 아니다. 리처드 백스터가 잉글랜드 국회와 잉글랜드 교회총회에서 저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였을 때, 백스터가 이 신앙고백서의 '칭의론' 서술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자, 백스터가 이신칭의에 관련한 잉글랜드 청교도 최고의 저서 "The Death of the Death in the Death of Christ"를 저술하여 백스터를 반박했던 것이다. 오늘날 청교도 개혁주의를 공부하는 이들은 존 오웬을 표준적인 신학자로 삼으니, 존 오웬이 강력하게 반박한 리처드 백스터를 틀려먹은 사람쯤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리처드 백스터는 존 오웬 못지 않게 신학에 정통한 면모를 보인다. 하지만 신학자가 아니라 목회자로서의 정체성을 굳세게 견지한 사람이다. 언제나 현실과 실천을 염두에 두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통찰력이라는 점에서 훗날 감리교회를 창시한 존 웨슬리의 선구자라고도 할 수 있다.
백스터의 대단히 유명한 저술 가운데 하나가, "A treatese of Self-Denial"이다. 이 책에서 일관되게 강조한 논지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참된 구원을 받은, 참된 신자라는 것이다. 이 성구에서 자기부인은 최종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 생명을 내놓는 것" 즉, "to follow Christ to Death"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생에서의 모든 복락과, 자기 안에 있는 모든 욕망과 애정, 그리고 본능을 힘써 부인해야 한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인종은 '거듭난 그리스도인' 밖에 없다는 것이다.
언약궤를 싫은 암소들은 새끼를 낳은지 얼마 안 되는 어미들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일부러 이런 암소들을 선택했다. 어미를 찾으며 우는 새끼들, 젖을 먹여야 하는 본능을 뒤로하고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고, 새끼를 찾아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벧세메스로 똑바로 갔다. 그 길의 끝에서 이 소들은 죽임을 당하고 제물이 되었다.
언약궤가 블레셋 족속의 손아귀를 벗어나 유대인들의 마을로, 마땅힌 있어야할 곳으로 되돌아왔다는 사실이 결코 핵심이 아니다. 암소들이 그 강력한 본성을, 새끼들의 울부짖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사명을 다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이 소들을 통해, 사사시대와 그 이후의 통일왕정 시대에, 그리고 택함을 받은 백성들의 자세 즉, 자기부인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하나님께서 극명하게 보여주신 사건이다.
좀 더 멀리 내다보면, 다윗의 믿음 그 밑바닥에는 바로 이 암소들이 보여준 순종과 헌신의 자세가 굳세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다윗이 죽을 때 솔로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 기록된 그대로 지키라"라고 유언하였을 때 바로 이 암소들이 보여준 정신을 깨닫고 익히도록 그리고 실천하도록 안배한 것이다.
우리 시대의 목사들이 성경을 읽고 신학을 공부했음에도
이 암소들의 반의 반도 못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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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실 권사
나는 성결교인이 아니다. 성결교회에 대해 전혀 몰랐다. 보수적인 신앙을 가르치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신학교라는 그 이유 때문에 성결교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때까지 익혔던 신앙패턴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지금 수원행 전철, 안양역 다음의 명학역 앞은 많이 복잡해졌지만 신학교 입학 당시에는 명학역 앞에서 수리산 밑자락의 학교까지 가는 길은 어수선했고, 해가 지면 어두웠다. 그저 수도권 변두리였을 뿐이다.
5층짜리 교사, 작은 건물 하나와 그 왼쪽의 자그마한 기숙사 하나뿐인 정말이지 볼품없는 학교였다. 서대문구 행촌동 산꼭대기에 더 볼품없는 옛, 학교건물이 있었다. 하지만 설립자 김응조 목사님은 이 학교부지와 그 자그마한 건물들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다.
성결인으로 평생을 살면서 성결교회를 발전시키고 싶었던 설립자 김응조 목사님은 학교를 건립할 수 있는 도움을 받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여기저기 알아보셨던 모양이다. 하지만 여의치 않았다. 학교 건립 문제를 놓고 기도하던 중에 "어째서 외국인에게 손을 벌릴 생각을 하느냐?"는 음성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으셨단다.
그래서 당시 중앙성결교회 홍대실 집사를 찾아가 도와달라고 하자, 그 자리에서 허락하셨단다. 그래서 홍대실 집사가 행촌동에 300편 부지와 건물을 지어 신학교를 시작하도록 하였고, 안양에 약 2만 3천 평의 땅을 마련하여, 역시 학교에 기부하였다. 그때 행촌동에서 운영되던 신학교를 안양에 마련한 땅으로 옮겼고, 훗날 작은 종합대학 규모의, 오늘날까지도 성결대학이라는 이름의 대학으로 발전하였다.
애초에 성결교인이 아닌 탓에, 홍대실 권사의 이름만 어렴풋이 알았지만 어느날 김응조 목사님이 단호한 목소리로 홍대실 권사님이나 성결교 신학교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지금도 내 기억에 또렷하다.
그때 김응조 목사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누군가가 성결교신학교는 소주팔아서 신학교를 세운 것이라고 비방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비방한 까닭은 홍대실 권사의 남편이 소주공장을 했던 모양이다. 서울 행촌동에 몇 백평의 땅과 건물을 기증하고, 안양에 2만 3천평이나 되는 땅을 기증했으니, 당연히 그 돈은 남편의 돈일테고, 당연히 술을 팔아서 번 돈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허나, 홍대실 권사의 인격이나 신앙 그리고 헌신을 너무나 잘 아는 김응조 목사님은 억울한 심정이었던 모양이다. 홍대실 권사님은 남편이 돈을 잘 벌었다고 해서 호사를 누리는 분이 아니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총독부 명령으로 성결교회가 강제로 폐쇄되었을 때, 교단의 목사님들과 더불어 옥고를 치르신 모양이다. 그 정신을 평생토록 잃지 않고, 고결하게 사시면서, 개척교회 목사님들을 성심껏 도우셨단다.
시골교회, 개척교회를 돕기 위해, 좋은 옷을 사입지도 않고 1년 내내 한 벌 옷만 이으시고, 지독하다고 할 정도로 철저하게 검약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편의 공장에서 나온 곡물 찌거기를 손수 리어카로 실어날라 돼지를 키웠고, 수백마리 닭을 키웠다. 그렇게 절약하고, 닭팔고 돼지를 팔아 모은 돈으로 틈틈이 땅을 사두었다가 학교에 기증했던 것이다.
물론, 남편과는 전혀 상관없이 홍대실 권사 혼자서 장사하고 사업하여, 전적으로 재산을 모아 신학교에 기부했다고는 단언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삶 전체를 살펴보아, 거짓없고 부끄러움없이 주님만을 사랑하고 평생 헌신했다는 점만큼은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홍대실 권사에 관련한 내 마지막 기억은, 1971년에 소천하신 홍 권사를 기념하는 비석을 소천하신지 꽤 시간이 흘러간 두에, 신학교 건물 앞에 세우겠다는 계획을 김응조 목사님이 밝히신 것이다. 반대자들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굳이 비석을 세우겠다고 고집을 부리신 것이다. 김응조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30대의 나이에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신 분이다.
그런 분이 보수적인 신앙을 천명하는 신학교 교정에 사람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자신도 잘 안다면서, 그래도 홍 권사님의 비석만큼은 세워서, 그분의 헌신과 신앙정신을 신학교에 들락거리는 학생들이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까지 하셨다.
나는 당시에는 그 말씀을 그저 말로만 들었다. 나의 보수적인 신앙은 문자 그대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기고 사라져야 맞지 않느냐"는 것이다. 아니, 그랬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십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왜 비석을 세워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셨는지,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보수적인 신앙, 혹은 보수주의 신학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목회자"들이 어떤 정신을 가져야 하는지를, 그리고 아무리 목사라고 해도 얼마나 쉽게 타락하고 타협하며, 자기이익을 추구하는지를 김응조 목사님은 너무나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죽기까지 주님을 순종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참된 헌신의 삶을 후배 목사들에게 각인시켜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신학교를 졸업한지 한 세대가 채 지나기도 전에, 교회를 인질로 삼아 돈벌이를 하는 목사들, 오직 물질적 성공을 위해 목회(?)를 하는 목사들, 교회 땅을 팔아 사취하는 목사들 이야기가 너무 많이 들린다. 목사의 타락하고 병든 부분을 지적하는 교인들을 이단혐의를 뒤집어 씌워 쫓아내는데 상부상조하는 목사들이 너무 많다. 정의롭지는 못해도 비겁하지는 말아야 하는데, 너무나 비겁하다. 얼마나 이기적인지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아직 시기상조인지는 몰라도, 목사 가문에서 그 후손까지 넘치도록 복을 받은 목사의 이야기가 많이 들려야 하는데, 실상 그렇게 많지 않다.
하지만 홍대실 권사의 자제들은 복되게 잘 살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주목해서 보아야 할 부분은 대를 이어 목사의 길을 걷는 사람들 가운데, 선대의 충성과 헌신을 이어가겠다고 굳게 결심한 사람들을 보기가 어려운데 반해 홍대실 권사의 자제들 가운데는 모친의 길을 되새겨 그 길을 이어가겠다는 이들이 있는 모양이다.
이런 생각은 나만 가진 것이 아닌 모양이다. 언젠가 신학교 동기와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그 친구가, 자신도 지금껏 목회를 하면서 학부 때 우리를 가르쳤던 목사님들처럼 어떤 목사가 진실한 목사인지, 그 본보기를 온 몸으로 보여준 이들을 만나 본 적이 없다고 술회하였다. 신학교 교문에 처음 들어섰을 때, 그런 분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 진짜 큰 축복이었다고 추억하였다. 그 친구의 술회에 격하게 공감했다.
참으로, 순전하게 헌신된 이가 그립다.
홍대실 권사님의 생애에 대해서는, 성결대학교 홈페이지에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여, 비문에 새겨놓았던 내용을 인터넷에서도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주소는 아래와 같고, "4대 이사장 홍대실 권사" 문구를 클릭하면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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