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29.]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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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개혁의 목적과 수단, 그런데 왜?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라는 당위성에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교회를 성경의 표준에 맞춰야 한다'라는 주장이 틀렸다고 말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교회개혁의 당위성을 상세히 듣게 된 때로부터, 지금까지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교회개혁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레토릭' 즉, 수사(修辭) 혹은 어법조차 바뀐 것이 거의 없다. 최소한으로 잡아도 4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말이다.
교회개혁을, 16세기~17세기 종교개혁을 본보기로 삼아 말하는 것이라면, 그 추동력은 '성경'에서 나오는 즉, '말씀의 능력'이 교회의 불량한 구조와 관례, 그리고 교회에 뿌리를 박은 종교기득권층의 '네트웍'을 깨뜨리고,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수준으로업그레이드한다는 의미이다.
길게 썼지만, 내용은 단순하다. 질문형으로 바꿔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헛 읽고, 헛 공부를 했느냐? 아니면, 참된 공부를 했느냐는 것이다. 만일 성경공부를 제대로 했다면, 하나님 말씀이 불어넣어주는 강력한 힘과 방향성으로 인해, 교회가 매우 참신해졌을 것이고, 교회가 참신해지지 않았다면, 과거에 비해 더욱 성경적인 신앙이 가득한 교회가 되지 않았다면, 성경공부를 헛 했다는뜻이다.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할 때, 그 말은 교회가 성경에서 가르치는 그런 모습이 아닌, 다른 존재양태를 갖추고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기에, 교회를 성경이 제시하는 본래의 모습으로 바꿔놓기 위해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뜻이다.
대개 이런 경우, 교회의 창설자이며 존속케 하는 근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회주권을 회복하는 것이 교회개혁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목적을 위해서는 성경의 가르침을 '앎' 즉, 지식이 수단이다. 앎을 통해 목회자와 신자들이 하나님을 알고, 교회다움을 알고, 신자다움을 알고, 그 앎을 실천하여 교회다움을 이루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에 성경공부가 절대적으로 부족할까? 70년대에 이미 '소그룹'(small Group) 혹은 셀(cell) 모임이 한국교회에 도입되었고, 주요 대학생선교단체에서 훈련받은 지도자들 가운데,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자가 되어, 적어도 한 세대에 걸쳐 자신들의 역량을 한국교회에 투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질적인 면에서 올바른, 바람직한 성장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나같이 못난 주변인이 보기에도, 너무나 뚜렷이 보인다.
그렇다면, 적어도 지난 한 세대에 걸쳐 한국교회에 유행한 그 좋다는 '성경공부'와 각종 '교육-훈련 세미나'를 모조리 그만둬야 마땅하다. 다시 말하자면, 70년대 초-중반에 대학생 선교단체들이 한국교회를 향해 "성경을 가르치지 않는다"며, 그리고 "변변한 성경공부 교재가 없다"며 한국교회에 내놓은 그 성경공부 자료들과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거둬들여야 한다. 그리고 선교단체들의 뒤를 따라 앞다투어 소개하고 도입한 각종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모조리 폐지해야 마땅하다.
지금 효과적인 처방을 내놓을 수 없다면, 한국교회는 70년대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7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교회를 일궈낸 성도들의 정신과 자세와 방법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지금보다 그때의 교회가 훨씬 더 건강하고 따라서 활력이 있었고, 좋은 열매가 있었다면, 그 본질을 회복하는 것만큼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중병에 걸린 환자의 실질적인 소망이 무엇이던가? 완벽하게 건강을 회복하여, 청춘과 같은 삶을 다시 살 수 없다면, 중병에 걸리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길 간절히 원하고, 그러한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몸을 돌보고 치료를 받지 않겠는가?
불과 수십년 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지 못한다면, 초대교회로는 어떻게 돌아갈 수 있을까?
성적이 나오지 않고 등수는 갈수록 떨어지는 학생이 1등을 따라잡고 싶은데, 그동안 전혀 효과를 보지 못한 공부방법론을 고집하고 있다면, 어떻게 성적이 올라갈 수 있을까? 어떤 방법이든 다 써보았더라도 효과가 없다면 그 모든 방법을 버려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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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전교 1등
전교 1등이라고 해서 그 사람이 1등급 인간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여럿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즉, 전교 석차를 1년에 한 차례씩 정한다고 하면, 전교 1등이 매년 한 명씩 배출되니, 개교한 지 50년 된 학교는 단순히 계산한다면, 50명의 전교 1등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전교 1등이라고 하더라도, 전국에 세기도 힘들만큼의 학교가 있다. 그 모든 학교마다 전교 1등이 있다. 거기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등 각급학교를 따지면 전교 1등이 얼마나 많을까?
그러면 전교 1등이 아니라 전국 1등은 대단할까? 대단하지만 세계에는 무수한 학교가 있다. 노벨 수상자들 여럿 배출한 학교들도 많다. 현대 세계의 문명을 가능케 하고 존속케 하는 "학문" 자체를 만들어낸 위인을 배출한 학교도 있다.
그러니 전교 1등이란 명칭은 도무지 의미가 없다. 신학교 학부 때 일이다. 학교에서 전교생을 상대로 '설교대회'를 열었다. 대회 개최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어리둥절했다. "도대체 설교를 가지고 시합을 한다는 발상이 가당키는 한 것일까?" 그리고 "다른 설교자를 이기기 위해, 심사위원들 앞에서 설교를 하는 것과, 공정한 채점 기준에 따라 점수를 받는 설교가 과연 설교일까?"라고 생각해보고는 도무지 마음에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나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1등을 했다. 그런데 그 1등이 내 친구(입학동기)가 섬기는 교회에서 파트사역을 하고 있었다. 우연찮게 그 친구가 그 설교 1등한 사람에 대해 말을 꺼냈다. 설교 1등을 한 뒤에, 세상에서 설교를 가장 잘한다는 자부심이 너무 지나치다 못해, 점점 더 오만방자해지고 안하무인이 되더니, 못된 사람이 되더라는 것이다. 학생시절의 설교대회 1등을 한 탓에, 설교자의 기본자세가 완전히 망가지게 된, 불행한 사람이다.
공부를 진짜 열심히 하던 1등도 있었다. 입학할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거의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교수들이 이 학생에 대해 내게 솔직하게 말한 적이 있다. 채점을 해보면 문제를 출제한, 혹은 과제를 내준 교수의 속마음을 완벽하게 파악하여 최고점수를 주지 않을 수 없도록 답안을 작성한다고 하였다. 언제나 최고 점수였다.
그런데 나는 의문이 생겼다. 본인이 아무리 열심히 공부를 해도 각자의 학과에서 각자의 공부를 하는 것이다. 서로 얼굴을 마주할 일이 없는 전혀 다른 학부의 다른 과에서 죽어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의 성적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비록 시간이 흘렀지만 이 학생의 비결을 알게 되었다. 이 학생은 경쟁심이 지독했다. 탁구를 치든, 테니스를 치든, 자신이 최고가 되지 않으면 못 견디는 것이다. 공부도 그랬다. 뛰어난 실력자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 있는지 늘 살피고, 그 실력자의 실력을 가늠해보고, 그 실력자가 시험 준비를 어떻게 하는지, 어떻게 노트를 작성하는지, 답안을 정리하는지를 치밀하게 알아보고 분석하고, 그래서 자신이 최고의 답안지를 작성하여, 최고의 점수를 받아내야 마음이 놓이는 학생이었다.
대개의 경우, 2등이나 3등은 1등과 경쟁하며, 1등을 이기기 위해 공부를 한다. 정말이지, 이런 공부법은 1등을 이기기 쉽지 않은 공부법이다. 그렇지만 한결, 손쉬운 공부법이다. 그런데 어쩌다, 혹은 기필코 2등이 1등을 따라잡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전교 1등의 자리에 올랐다면, 그 1등 자리를 계속 유지하려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본래 1등은 경쟁자가 없는 법이다. 즉, 2등은 1등과 경쟁하면서 1등을 따라잡아 제끼고 1등을 넘어서서 1등이 되고자 하지만, 1등이 2등에게 따라 잡히지 않는 공부법이란 것은 원래 없다. 1등을 계속 유지하는 공부법이라는 것도 없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이 지독하게 공부를 해서, 성적을 올리는 비법같은 것을 전수받든지 깨우치든지 하여 1등이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 그 어리석음을 깨뜨리지 않으면, 1등이 된 뒤에 그 "경쟁심"을 정리하지 못하여, 계속해서 "2등, 3등 등등"과 끊임없이 경쟁을 치르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경쟁심"이란 훈련 받는 사람에게는 필요할 때가 있기는 하지만 "경쟁심"은 "이기심"의 다른 형태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보다 잘났다는 평가를 받고 싶고, 최고의 자리에 홀로 서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니 말이다.
따라서 전교 1등이 되겠다고 결심하고, 다른 모든 학생을 능가하고, 그 1등 자리를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속에는 당연히 어떤 색깔로든 "이기심"이 충만해진다. 2등의 속마음에 들어가 있는 이기심과, 1등을 계속 차지하고 싶은 이의 "이기심"은 차원이 다르다.
이기심이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는 악영향을 낳는다면, 전교 1등을 지속한 이의 속마음과 인격은 그 자신의 이기심에 의해 얼마나 많이 파괴되었을까? 1등을 지속하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얼마나 엄격하게 관리하고, 잠시라도 허튼 곳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는 그 "열심"이 얼마나 큰 이기심으로 발전할 것인가?
전교 1등은, 다른 면에서 본다면 치료 받아야 할 인격적 상처가 무척 깊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교 1등의 성적표로 세상에서, 교회에서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 물론, 전혀 쓸모없지는 않을 것이다. 전교 1등을 차지하고 유지하던 그 열정과 방법론을 통해, 그 지독한 경쟁심을 통해, 세상에서 1등이 되고, 목회를 하더라도 1등이 되기 위해 지독하게 노력하여 결국, 1등 교회를 만들어내는 경우는 있겠다.
하지만 세상에서, 한국에서 1등교회란 뭘까? 하나님께서, 그리고 우리 주 예수께서 언제 믿음에 등수를 매기고, 목회사역에 등수를 매기고, 다른 모든 경쟁자를 물리친 사람에게 '1등 면류관'을 씌워주겠다고 약속하셨던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여럿을 비교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 뭘 하든 1등이 되고 싶어한다. 제일 큰 교회를 목회한다고 자랑하고 싶어한다. 버려야할 마음가짐이다. 버리지 않는다면, 어리석은 1등이 될 뿐이다.
어리석은 자는 그 어리석음 때문에 결국 망한다.
어리석은 전교 1등을 여럿 알고 있었지만, 진짜배기 1등도 알았다. 그래서 깨달은 바가 있다.
경쟁심으로 쌓은 실력은, 남을 돕는 이의 실력을
능가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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