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28.]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
|
|
꿈 !! 천성 앞에 도착하니
꿈이라는 것을 거의 꾸지 않는데, 며칠 전에는 너무나 생생한 꿈을 꿨다. 내가 죽었는지, 언제 죽었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어떤 길을 열심히 걸었다. 마치 오랫동안 고대하고 기다리던, 지극히 중요한 어떤 곳을 향해 가는 듯했다.
중요한 목적지에 거의 도착하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길을 막고 뭔가를 조사하는 듯 했다. 뭐지 하면서도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고, 나는 "예수를 믿는다"라는 분명한 확신이 있고, 목사로서의 내 삶이 틀림없는 증거이기에, 나는 거칠 것 없이 나의 길을 계속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런데 문득 내 앞을 가로막더니, 내게 "당신의 상처를 보이시오!"라고 점잖하지만 당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상처라니?라는 생각에 깜짝놀랬다. 네 믿음을 보이라! 혹은 네 믿음을 증명하라! 이런 요구가 아니라 상처를 보이라니?!
내게 그런 맹랑한 요구를 한 사람의 얼굴이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 질문을 듣는 순간, 내 눈에 확 들어온 것은 그의 온 몸에 있는 상처들이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상처가 생길 수 있는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상처들이 그의 몸 곳곳에 나있었다. 심지어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간, 그런 상처들도 있었다. 커다란 이빨 자국도 있었다.
내게 상처를 보이라고 요구한 이가, 내게 다시 말했다. "부디, 부끄러워 마시고, 주 예수를 위해, 받은 상처를 보여주시오!" 그리고 "상처가 크고 많을수록, 존귀한 자요,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요!"라는 말도 했다.
비록 꿈속이지만, 그 말을 듣고 내 자신의 몸을 돌아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다른 사람들을 보니, 영광의 상처를 입은 이들이 즐겁게 노래하며, 계속해서 길을 갔다. 영광의 빛 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몸에 상처가 없는 사람들도 그 영광의 빛속으로 걸어가길래, 쳐다보니, 그 사람이 내게 말했다. "저 사람들은 비록 몸에는 상처가 없지만 심장에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정말이지, 아주 고귀한 상처들이지요!" 그 말을들으니 더욱 부끄러워지고, 눈물이 났다. 그러다가 잠에서 깼다.
정말이지, 희안한 꿈이다!
|
|
|
너는 왜 신학교에 진학하는가?
내가 신학교에 진학하겠다는 생각을 밝힌 것은, 고등학교 3학년에 진학한 뒤에, 진로를 상담하는 담임선생님에게 였다. 처음 3학년이 되었을 때는 어물쩍 넘어갔지만 1차 모의고사를 치르면서는 분명히 내 계획을 밝혀야 했다.
나는 1973년에 개교한 사립 남자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당시 수원의 명문고등학교는 1909년에 수원상공회의소가 설립한 "수원고등학교"와 1954년에 설립된, 공립학교인 "수원수성고등학교"가 있었는데, 이 학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은 이사장의 열망은 전국에서 우수한 교사들을 선발하여 투입하고는, 마치 특수목적학교처럼, 대학진학률을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2학년 때부터 우열반으로 나누고, 주요 과목은 성적순으로 분반하였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학교에 "고속인쇄기"를 들여놓고, 시도때도 없이 각 과목의 인쇄물을 나눠주고, 각 과목마다 수시로 시험을 보았고, 매주 모의고사를 보고, 그 성적 변화를 그래프로 그려놓았다. 물론, 담임교사와의 진로상담은 "일급" 입시학원의 "컨설팅"에 다름 아니었다.
고만고만했던 성적은 2학년 2학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오르기 시작했는데, 2학년 2학기 말에는 상위권에 올라섰다. 당연하게도 담임교사는, 지금의 내 성적을 유지할 경우 진학할 수 있는 학교와, 내 성적을 어떻게 보강하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를 제시하면서, 희망을 가지고 더욱 노력할 것을 재촉했다. 그리고 내가 목표로 하는 학교가 어디인지를 말해보라고 채근했다. 5월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내가 목표로 하고 있는 학교가 어디인지 어물쩍 넘어가기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할 수 없이 신학교에 진학하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담임교사도 3학년 교사들도 뒤집어졌다. 결국 교회에도 알려졌다. 담임목사님도 놀랬다. 나를 전도하여 "교회"에 발을 디디게 만든 "친구"도 놀랬다. 당시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한 마디로 압축하면, "아니? 니가 왜?"라는 것이었다. 신학교에 진학하겠다는 의사를 밝힐 때까지 누구와도 상의한 적이 없었다. 교회활동에 앞장서서, 마치 나는 장래에 목회자가 될 것이라고, 그런 자질이 내게 넘친다고 과시한 적도 없었다.
정말이지, 신학교에 입학하는 면접 때에도 신학교를 다니면서도 "나는 목사 혹은 전도사가 될 것입니다"라고 장담한 적이 없다. 면접을 볼 때도 "나는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온 것이 아닙니다"라고 답했던 기억이 아직 남아있다. 그 무렵 내 철학은 딱 두 가지였다. 첫째, 주님께서 공부를 시키는 것만큼만 하겠다. 더이상 신학공부를 하지 말라고 하시면 언제라도 당장 그만 두겠다. 평생토록 주일학교 교사로 살아도 괜찮은 교사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겠다. 둘째, 나쁜 목사가 될 것 같으면 언제라도, 당장 그만 두겠다. 목사직분을 더럽히면서까지 목사로 살아남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쁜 목사는 다른 사람의 신앙을 망가뜨리고, 주님을 노엽게 만들 위험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고3 담임에게 신학교에 진학하겠다고 밝힐 때까지 적어도 1년간 깊이 고민하면서 그 정도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고, 아주 가까운 교회친구 두 사람만 놀라지 않았다. 그 외의 사람들은 놀라움과 의아함이 섞여 있었다.
그런데 그 놀라움과 의아함이 내게 표현될 때, 그들이 속에 숨겨놓았던 진짜 가치관이 드러났다. 그리고 수십년 세월이 흐른 지금 돌이켜보면, 그들은 그들 자신의 가슴 속에 숨겨두었던 가치관 그대로의 궤적을 따라, 그야말로 자기 소견대로, 자기 길을 갔다.
그때 당시에는 그들이 내게 대해 의아해 했다는 것에 오히려 내가 적잖이 놀랬다. 당시 내가 출석하던 교회는 성경공부에 정말 진심이었고, 진정이었다. 모두 성경을 열심히 읽었고, 고등부 성경공부에 히브리어 헬라어가 수시로 등장했고, 심지어 잠언을 히브리어 성경본문을 놓고 함께 읽으면서 공부하기까지 했다.
당시에 바람몰이(?)까지 했던, 유명 대학생 선교단체의 성경공부 프로그램이 오히려 심심할 정도였다.
그렇게까지 성경공부를 했는데도, 그렇게나 수준 높은 "교사" 혹은 "목사"들이 가르쳤는데도 그들의 가치관이 변하지 않은 것이 내게는 오히려 놀라움이었다. 지금 돌이켜 평가해보면, 그렇게 수준 높게 성경공부를 가르쳤던, 그 선생들, 그 전도사들이 외려 "신앙이 없는" 이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인생을 살았다. 심지어 온 가족이 베뢰아 이단에 빠지기도 했다.
그렇다, 사람은 배운대로 행하지 않는다. 속에 품은 "원리" 그대로 가치관이 형성되고, 그 가치관에 따라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간다. 원리를 그대로 둔채, 인생관을 바꾸더라도 "가치관"이 바뀌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물질주의적, 금권주의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면, 물질이나 금전을 좇아 갈 수 있는 데까지 간다.
가치관을 바꾸더라도, 그 중심원리가 바뀌지 않으면, 그가 설혹 목회의 길로 간다고 한들 마음 깊숙이 간직한 중심원리를 따라간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과 성령을 주셔서, 그럼으로써 하시고자 하는 일은, 우리의 중심원리부터 바꾸고, 그 원리를 어떤 상황과 시련 혹은 유혹에도 불구하고 견지하고 그 원리에 부합한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삶을 바꾸는 성경공부라야 삶을 바꿀 수 있다. 삶을 풍요롭게 하는 성경공부라야 삶이 풍요로워진다. 그런데 우리는, 한국교회는 교회를 갈아타기 위해, 종교적 평안과 위안을 얻기 위해 성경공부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제자훈련"이라고 떠들지만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제자훈련이 아니라, 목사와 교회의 제자가 되기 위한 길들이기, 가스라이팅에 다름 아닌 "훈련"이 거의 대부분이다.
예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좇지 아니 하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고,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을 그대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어떤 특별한 "프로그램"이나, 훈련이 필요치 않다. 어떤 식의 훈련을 받은 사람이 "자기를 부인하는" 요령을 숙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어떤 점에서 자신의 가능성에 실망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에 대해 좌절하는 것이며, 자기에 대한 희망을 전적으로 포기하는 것이다. 자신을 슬퍼하고 저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바울이 종종 언급하는 "종" 진짜, 종(slave) 혹은 노예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사업에도 실패하고, 인생에도 실패하고, 비전을 품지도 제시하지도 못하고, 일말의 대책도 찾지 못하여, 자신의 남은 인생 혹은 가족들의 남은 인생을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종으로 팔아넘기는 상황은 적극적인 행위와 성취에 의해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절벽 끝에서 절벽 밑으로, 나락으로, 떨어져내리는 전적으로 "피동적인" 것이다.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도 없고, 설혹 그 어떤 것을 성취하더라도 결코 자신의 능력에서 이뤄낸 성취도 아니고, 그 결과물을 자기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기대를 저버릴수록, 그만큼 주님의 영광을 사모할 수 있는 법이다.
교회 송사를 경험해본 어떤 변호사가 어떤 사건을 수임하는 과정에서 한 말이다. "늙은 목사의 노욕은 정말 대책이 없습니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교회 문제를 빨리, 해결할 욕심에, 후임목사도 교인들도 한결같이 권위를 인정할 수 있는 은퇴한, "원로목사"를 모셔다가, 권한을 부여하면 좋을 것이라는, 교인들의 생각에 단단히 일침을 놓듯이 어떤 변호사가 지적한 말이다.
평생을 주님을 위해 목회자로 살았다지만, 늙으면서 추해질 수 있다는 말이며, 그 경력이 경건 혹은 거룩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말이자. 정말이지, 맞는 말이다.
|
|
|
|
좋아요, 구독, 그리고 가입을 눌러주시고 물심양면의 후원은
동영상 제작과 미디어 선교활성화에 큰 도움이 됩니다.
질문 혹은 의견을 아래 이메일 주소로 보내주시면, 성심을 다해 반영하겠습니다.
All Rights reserved
본 메일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 유포하는 것을 허락합니다. 발췌하여 다른 미디어에 포함시키거나 전제하는 것은 저작권자로부터 별도의, 명백한 허락을 받아야 하고, 허락 받은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