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10.]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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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의 정신을 버렸다, 미래를 버렸다
16~17세기 종교개혁은 "개신교회와 그 신학"의 뿌리이다. 종교개혁 정신을 계승하는 개신교회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프로테스탄트" 즉, "저항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을 계승하는 신학의 본질은, 어떤 점에서는, 신학의 내용 즉, 종교개혁가들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 정통교회의 교리들 이전에, 종교개혁가들이 모본을 보인 부패와 불의에 과감히 맞선 "저항정신"에 있다.
종교개혁적 저항의 정신을 더욱 깊이 들여다보면, 성경 전반에 걸쳐 지도자들에게 요구하는 성경과 정의에 입각한 마음가짐 및 그 추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점을 선명하게 드러내주는 문구를 최소한으로 나열해보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행복을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그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정신을 인문학적-철학적 관점에서 다시 설명하자면, 이원론적 세계관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일원론적 세계관-일원론적 유일신 사상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원론적 신관, 이원론적 세계관, 이원론적 가치관은 선과 악의 이분법을 기본적인 인식틀로 사용하게 된다.
선과 악의 이분법을 사용하는 설명법은 참 쉽다. 신앙생활에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법을 설득력있게 설명하기란 매우 쉽다. 게다가 선과 악의 이분법은 죄를 지은 사람이 그 죄의 책임을 다른 쪽에게 둘러대고, 자신은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변명을 만들어내기가 아주 쉽다.
그래서 이분법, 이원론에 물든 깊이가 깊을수록, 변명과 핑계가 많아지고, 왜 하나님은 나를 이렇게 약하게 창조하셨는지 한탄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쏟아내기가 쉽다. 최후의 순간에도, "왜 하나님은 이렇게 약한 내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지 않느냐?"는 말로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기가 쉬워진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종교체계가 지극한 수준으로 발전한 것이 불교이며, 힌두교이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가 제창한 "불가의 가르침"에서 원시불교로, 그 다음에는 대승불교로 발전하는 전체 과정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원론적 세계관을 섬세하게 다듬어 종교로 심화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심화에 지극한 영향을 미친 것이 "힌두교"로 통칭되는 인도 종교체계이다.
이러한 발전에 기독교 즉, 성경이 심대한 영향을 미쳐 불교가 그 원뿌리인 "힌두교"와 상당히 다른 요소들을 엄청나게 포용하게 되어지만, 이원론이라는 내적원리 때문에 우리는 아는 대승불교, 중국불교-한국불교가 되었다.
이런 불교가 기승을 부리고, 고도로 발전한 지역의 특징은, 사람의 삶을 향상시키는 문명적 발전이라는 것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흔히 서구문명은 기술문명이라는 외적인 것의 발전이고, 동양문명은 "문화와 사상"이라는 삶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동양인의 열등감을 숨기기 위한 어거지 논리에 다름 아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려는 노력, 도탄에 빠진 사람들을 다시는 그러한 도탄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제도적 정비, 공평과 정의를 사회적으로-보편적으로 실현하는 민주화와 복지제도의 발전이라는 것은 불교문명권, 힌두교 문명권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한국불교는 중국불교가 전래된 것인데, 고구려 백제 신라에 처음 불교가 전래될 때 이미, 무속과 결합한, 무속화한 불교로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시대에 불교가 고도로 발달하게 된 배경에는, 중국(당나라)에서 불교의 폐단을 직시하고 불교를 폐지하다시피 탄압하자, 중국 불교의 주요 자원이 고려로 건너왔고, 상대적으로 고려 불교가 심화되었던 것이다. 조선불교에 비해 "교종" 즉, 교리연구가 발전했다지만, 석가모니와 그 직접 제자들의 가르침에서 상당히 거리가 있는, 타클라마칸 사막 주변의 오아시스 도시들에서 타종교들과 융합하여 만들어낸 "변종"이었던 것이고, 그것마저도 이미 중국에서 도교와 무속과 결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틀에서 고려불교 연구를 통해 자기 한계를 극복하고,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단계를 창출할 수 있을까? 불교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입증되었다.
기독교와 정통교회 교리를 학습하고 실천하면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이 "정상적인" 결과일까?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행복을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자기 혁신의 사람"이다.
그러면 원점으로 돌아가서, 오직 예수의 이름만 믿으며, "오직 믿음으로"를 외치며,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지 않고, 이웃의 행복을 위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의 가난을 극복하도록 돕지 않고 억울함에 사무쳐 울부짖는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고 오히려 손해를 끼치는 모든 일을 모른 척하며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확신으로는 "천국에" 갈런지는 모르지만, 세상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실제로는 교회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교회에 무조건적으로 희생하고 헌신하고 목사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사람이라는 착각이다. 교회에 많은 돈을 기부하고 헌신하고 교회에 순종하는 사람이 최고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자기중심주의"에 빠진 사람은 사실상 이원론자이며, 어쩌면 기독교인의 탈을 쓴 불교도일 수도 있다.
교회가 집단적 이기주의에 빠지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포기하고 절대주권적 하나님 중심의 일원론적 유일신 사상을 따르지 않는 것이며, 자기를 극복하며 환골탈태하는 복음적 삶의 원리를 폐기하는 셈이다. 자기 자신의 혁신과 변혁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며, 자신의 삶을 담아내는 공동체인 사회와 민족이 더욱 발전되고 살기 좋은 나라로 혁신되는 원리를 버리는 것이다. 축복의 원리를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더 나은 미래라는 결과를 미리 내다버리고 싹을 잘라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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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反)유대주의
유대주의자들, 특히 시온주의자들은 독일 제3제국의 총통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6백만명의 유대인을 주인 '홀로코스트'를 기독교에 만연된 "반(反)-유대주의 정서" 탓으로 돌린다. 그리고 이 반유대주의 정서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를 설명해야 하는데, 일반적으로, 4세기 초에 콘스탄티노플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기독교는 황제의 권력에 복무하는 댓가로 유일한 공식종교로서의 혜택을 누리는 것 즉, 교황제도의 수립과 교황통치와 결부짓는다.
하지만 이 설명은 엉터리다. 유럽 세계의 정치제도 발전과 서구 기독교 체계의 형성 및 발전에 어디에도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지 않는 설명이다. 역사가 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대충대충 그림을 훑어보듯 살피는 이들의 안목에 비슷해보이는 장면이 몇 군데 있기는 하지만, 분별의 눈을 조금만 떠보면, 우리가 어설피 아는 교황 및 교황제도와, 실제로 역사적 으로 존재한 교황 및 교황제도와 맞지 않는다. 즉, 대부분의 반(反)-교황주의자들, 친-유대주의자들의 언설에 일치하는 그런 교황제도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황제의 권력에 복무하여 제국의 통치를 원할하게 하고, 새롭게 정복한 종족들을 기독교화하여 황제의 신민으로 만드는 역할을 교회가 했다는, 그런 그림에 얼핏 맞는 경우는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당시 로마 주교의 관계가 아니다. 겉보기에라도 이 그림이 맞는 경우는, A.D. 814년 아헨 즉, 오늘날 독일연방공화국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서쪽 끝에 위치한 오래된 도시 아헨에서 숨을 거두고 매장된,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마그누스 즉,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샤를마뉴, 영어로는 Charles the Great이다. 그것도 샤를마뉴 그 자신과 통치 영역 전체 즉, 프랑크 왕국 전체와 관련해서 맞는 설명도 아니다. 샤를마뉴 자신이 개인적으로 정복을 완료한 "새로운 영토" 즉, 훗날 동프랑크 나아가서는 독일이라고 알려진 지역에 국한해서만 맞는 설명이다.
그리고 이탈리아 로마에 자리잡고 있던 로마주교 즉, 교황과 맞는 설명도 아니라 샤를마뉴가 직접 정복하고 설치한 "대주교(들)" 대체로 마인쯔 대주교, 쾰른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와의 관계가 그렇다. 이 세 대주교가 초기에 선제후권을 가진 주교들이다.
게다가 로마주교를 Pope라는 특별한 명사를 사용하여 지칭할 때 이 Pope를 Church-Emperor라는 식의 개념으로 사용된 적이 없다. 유럽에 존재했던 'Emperor'를 '황제'라고 번역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진시황제의 황제, 명나라 황제의 황제, 청나라 황제의 황제라는 식의 그런 황제가 유럽에서 군림했던 적은 없다.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중세유럽을 "Christendom"이라고 부를 정도로 기독교 신학과 윤리 그리고 통치원리가 지배했는데, 기독교에 진심일 경우 동양식의 "황제"라는 개념이 들어설 공간이 없다.
본래 다신교 숭배자들인 정복국가 로마에 기독교가 들어서고, 기독교를 공인하고 국교화하면서 황제의 개념이 바뀌고, 통치의 개념도 바뀌고, 인권과 민주화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종종 독재를 추구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려는 시기도 있었고 그런 나라가 있었지만, 그런 나라는 패권과 부귀영화를 놓치고 뒤쳐졌다.
로마주교인 Pope를 "교황"(敎皇)이라는 단어로 바꾸고, Pope의 측근 보좌역들인 Cardinal들을 추기경(樞機卿)으로 번역하여, 중국의 황제와 동급의 절대권력자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 사람은 중국에 온 첫 선교사 마태오 릿치였다. 이 때문에 마태오 릿치의 천주실의를 처음 조선에 들여와, 천주실의를 통해 처음으로 "천주교"를 알게 되고 천주교 신자가 된 이들도 로마의 주교를 "교황"이라는 절대권력자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로마의 교황이 휘하의 프랑스 국왕군대 가운데 중국에 주둔한 일부 부대를 조선에 출병시키면 조선이라는 썩을 때로 썩은 나라는 손쉽게 붕괴될 터이니, 제발 군대를 보내달라고 간청하는 "황석영 백서"가 등장하는 웃픈 현실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러니 19세기 말, 드레퓌스 사건을 발단으로 하여 시작된 시온주의가 20세기 이스라엘 건국운동으로 번지면서, 반(反)-유대주의가 부당하다고 주장하기 위해, 억지로, 엉터리로 궤어맞춘 가짜 논리에 휘둘리면 결코 안 될 것이다.
엉성한 궤변에 휘둘리는 논리력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이 어불성실이고, 나만 아니면 되고 다른 사람들이 궤변에 휘둘리든 말든 상관이 없다는 식의 불의한 사고방식을 간직한 채 성경의 심오한 진리를 깨우치고 삶으로 체현한다는 발상은 몽상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사기꾼들을 그냥 내버려두어, 사기가 횡행하면, 나라가 사기꾼 천지가 되면 과연 어떤 사람의 삶이 평안할 수 있을까? 어떤 교회인들 피해가 없을까? 결국, 모두가 피해자가 된다.
갓 태어난 새끼 독사라고 해서 독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리다고 내버려두면 어느새 훌쩍 커지고 독사에 물리는 사람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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