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뜻이란 무엇인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8개의 글자로, 불교의 정신세계의 본질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표현이다. 물론, 법등명 자등명이라는 붓다의 유언에서 수련하는 각 개인의 독립성을 강조했다고는 하지만 그 개인보다 먼저 존재하는 "법"은 궁극적으로 하나 뿐이다.
불교를 수용한 어떤 누구도 불교의 정신, 불교의 가르침을 통해 세상을 혁신하겠다고 도전한 사람이 없다. 오히려 정반대다. 세속 권력의 비호를 받아, 불교가 널리 퍼질 수 있었다. 세속 권력자가 불교를 버리면 버려진 그대로 존재했다. 세속으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기부받으면, 그 재산을 향유하면 그 뿐이다.
교회의 역사는 한마디로, 혁신의 역사다. 교회 자신을 변혁시키고,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더 좋은 세상으로 변혁시켜왔다. 무지한 사람들을 교육시키고, 새로운 영농기술을 개발하여 보급하고, 의약을 발전시켜 사람들을 고쳐주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학교"였고, 병원이었고, 도서관이었고, 연구소였고, 읍면동 행정사무소였다. 교회행정은 본질적으로, "협의"를 근간으로 한다. 무식한 개신교 목사는 로마 가톨릭(천주교)은 "교황주의"이기 때문에, 천주교회는 교황이 자기 마음대로 모든 일을 처결하고, 철두철미하게 상명하복의 명령과 복종의 체계라고 착각하고 있다.
"하나님은 독재하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슨 말을 하고자 알듯도 하지만, 기술적인 의미를 따진다면, 대단히 잘못된 표현이다. "하나님은 홀로 다스리신다"라고, 마치 하나님의 존재가 단수인 것처럼 느낄 수 있지만 오직 하나(Only One)이신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이렇게 세 독립된 실체들(Three Person)이신 분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운명을 창세 전에 홀로 작정하신 분이고, 사람이 행할 바를 인도하시는 분이지만 그 당사자 인간의 의사를 무시하고, 무지막지하게 독재권력을 휘두르는 분이 아니다.
사도행전에도 나와있다시피, 모세오경에 나타난 모세의 유사제도(이드로 시스템)이 암시하듯이, 기독교 전통은 "회의"와 "협의"의 정신이다. 이 정신이 야만족 게르만인들을 개화하여 현대적 "의회제도", "위원회제도"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이끌었다.
교회제도는 교황제도, 감독제도, 장로제도, 회중제도를 막론하고 "회의"를 근본으로 한다. 교황제도라는 말이 마치 가장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인 것처럼 연상시키지만, 실제로는 전 세계 모든 "주교"(감독)의 합법적 권위는, 주교회의의 수장인 로마주교에게서 나온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Papalism이다. 이에 반해, 갈리칸주의(Galicanism)이 있다. 로마주교(교황)는 세계 주교회의에 속하는 1인에 불과하고, 최종적 권위는 바로 그 주교회의에 있고, 로마주교(교황)가 주교회의를 대표하는 대표권자일 뿐이라는 사상이다. 기독교 역사를 2천년이라고 한다면, 그 역사의 거의 대부분은 "갈리칸주의"가 우세했다. "Papalism" 즉 교황절대주의는 비교적 최근에 정착된 관념이다.
그렇다고 해서, 즉 지금 시대에 "Papal system"이 지배적 관념이라고 해서 "교황"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각각의 주교구가 독립되어 있고, 그 주교구의 행정에 교황도 임의로 간섭하지 못한다. 그것이 천주교 교회버베 "법제화" 되어 있는데, 후대의 누군가가 그렇게 제도를 만든 것이 아니다. 교회법에 따르면, 처음부터, 사도적 모범을 따라, 지난 2천 년 동안 그렇게 제도를 유지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황의 공식적 선언은 "천주교 교회의 뜻"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지극히 오랫동안 유지해온 "전통과 회의체제"에서 합법적으로 도출된 결론이라는 뜻이다. 교황의 칙령이 교황의 이름으로 발효되지만, 교황을 보좌하기 위한 각종 행정제도가 구비되어 있다.
교황이 미워하는 사람은 무조건 붙잡아가 형틀에 묶어놓고 고문을 한다는 우리의 이미지는 서양 교회사에서 역사적 경험과 더불어 도출된 이미지가 아니라 조선시대 사극에서 보아온 이미지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 이미지인 경우도 역사적 고증이 정확하지 않다. 권력을 가진 자,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마음대로 고문하고 죄인으로 만든다는 이미지는 19세기 세도정치 즉, 정조대왕의 아들 순조가 국왕이 된 후에, 외척인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외척들이 발호하여 국정을 농단한 것에서 비롯된 이미지다.
19세기 세도정치로 인해 약자들, 서민 대중이 만든 말이 "억울하면 출세하라"라든지,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라든지 "눈치껏 알아서 기어라"라는 말이 아닌가 싶다. 강한 자 앞에서는 죽은 듯이 엎드려 있다가 자기보다 약한 사람이라는 것이 확인되는 순간, 혹은 완장을 팔에 차면, 제멋대로 권세를 휘두르며, 기세등등한 폼새도 그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나온 정신세계가 아닌가 싶다.
형편없는, 사악한 목사가 겉으로는 거룩한 척, 고결한 신학을 전개하여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 하는 경이로운 역사를 이루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사리사욕을 채우고 교인들 머리를 발로 짓밟는 듯한 쾌감을 누리는 것을 보잘 것 없는 (서리)집사가 그게 뭐냐고 근거를 물을 때는 화들짝 놀라서, 온갖 신학적 어휘를 현란하게 구사하며 "구원받지 못한다"라고 겁박한다. "어디 감히 교회의 뜻을 거스리느냐며, 질책하고 회개를 촉구한다."
기가막힌다. 서울 한 복판에 큼지막한 건물을 가진 교회에 "재정장부"가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 않다. 회의록조차도 없다. 예산결산도 있다고 할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집사들이 모여, 우리 교회도 재정장부를 제대로 기록하자고 건의하자, 이단이니 뭐니 하면서 결국 집사들을 쫓아냈다. 이때 나온 말이 "교회의 뜻"이라는 말이다.
최근에도 "모" 교회에서 여름 수련회를 개최한다면서 수련회비를 공지한 모양이다. 그 비용이 너무 높게 잡힌 것 같아서 누군가가 그 내역을 공개해달라고 하자, "교회의 뜻"에 반항하니, 회개해야 한다느니, 한 모양이다.
천주교든, 감리교든, 장로교든, 침례교든.. 기록된 하나님 말씀 즉, 성경을 근간으로 한 종교는 "전체 교인들의 정당한 합의" 혹은 그 합의에 기초한 것만이 "교회의 뜻"이다. 목사의 생각과 의지가 곧 교회의 뜻인 것이 아니다. 엄격히 말하면, 과반수가 동의하여 통과되었다고 하더라도 "교회의 뜻이라고 하기에 어렵다" 왜냐하면, 과반수에 못 미치지만 "반대자(들)"이 존재한다.
다수파에 의한 독재 즉, 소수파는 다수파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것도 정상적인 교회문화가 아니다. 현대의 회의법에도 "중요한 사항"은 과반수가 아닌 2/3 이상이 동의를 해야 한다. 이것은 다수파보다 소수파(반대파)의 비중을 2배로 높여준 것이다. 즉, 반대파 1표는 찬성파 2표의 값으로 올려준 것이다.
이것은 강압이 아닌, 설득과 합의에 의해 거의 대다수 동의를 얻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서구 민주주의, 복지사회가 실현된 것이다. 교회문화는 마지막 한 사람의 반대자도 만족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을 모색하고, 설득하고, 기다리는 문화라는 뜻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는, 성경의 정신을 구현하는 현실적인 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떤 교회공동체를 구성하는 전체 교인들의 "최종적 합의"라고 할지라도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의 가르침 즉, 그리스도의 뜻"이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만장일치 결의라고 하더라도 "불법결의"는 원천적으로 무효하며 효력이 없다.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는 말씀과 성령으로 자기 몸을 통치하신다. 그러므로 어떤 목사가 "교회의 뜻"이니 뭐니 운운해도..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에 어긋나면, 그 뜻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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