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24.]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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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 (1)
아래 글은 제가 속한 '기독교한국침례회'의 교단 신문인 '침례신문' 제1492호(23.08.26일자)에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와 명품 번역성경(1)"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입니다. 저는 이 주제로 몇 개의 동영상을 제작하여, 제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킹제임스 유일주의"라는 함정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분들이 여전히 많고, 심지어 제게 진정으로 자문을 구하면서도 선뜻 "손절"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자들 가운데 "표준킹임스성경"이라는 또 하나의 한글번역본 킹제임스 성경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러고는 킹제임스 흠정역 대표(정동수)와 표준킹제임스 대표(윤경원)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차제에 킹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에 대해 몇몇 지점을 검토해보자는 생각으로 이 글을 기획했습니다. 이번 주에, 침례신문에 기고글이 인쇄 배포되어, 이 레터에도 그대로 전제해 봅니다. 많은 아량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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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종종 ‘어떤 성경이 가장 좋은 성경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런데 이 질문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다. 질문자의 의도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다른 답변이 필요할 수 있는 질문이다. 그래서 질문자 자신도 명확하게 의식하지 못한 ‘궁금증’의 원천을 찾아보면 대개는 두 개의 질문으로 정리된다. 그렇게 수렴되는 이유는, 필자가 제작하여 올리는 설교 동영상에서 설교 본문을 아직도 ‘개역한글’을 사용한다고 명시하고, 개역한글 본문을 기준으로 설교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필자의 유튜브 채널 [임원주 목사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에서 사랑침례교회 정동수 목사라는 이의 신학과 이 사람이 주장하는 소위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KJB onlyism)를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다수의 동영상을 제작하여 올렸기 때문이다.
정동수씨가 ‘사랑침례교회’라는 교회를 개척하고 성공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전까지는 영어공부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 영어공부에 어떤 영어성경을 사용하면 도움이 될까 혹은, KJV을 공부하면 성경지식과 더불어 영어실력이 좋아지는 지에 대한 질문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킹제임스유일주의는 본래 미국에서 세대주의가 위세를 떨치면서 등장한 20세기 미국적 현상이다. 1611년에 KJV을 발간한 영국이나 다른 영어권 국가에서는 ‘킹제임스 유일주의’같은 이런 운동이 나온 적이 없었고 자리를 잡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유독 미국에서는 세대주의라는 기현상이 미국교계의 저변을 휩쓸었고, 그 기반이 되었던 ‘스코필드 관주성경’에서 ‘킹제임스 유일주의’라는 기이한 운동이 번져나왔다.
20세기 중반에, 고전적 세대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개정세대주의라는 수정판이 나왔고, 20세기 후반에는 점진적 세대주의가 등장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변혁의 핵심에는 ‘스코필드 관주성경’의 본문과 각주해설에 대한 고집이냐 아니면 개정(수정)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갈등과, 세대주의 성경해석 원리를 고집할 것인가 아니면 부정하고 수정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갈등이 뒤섞여 있다. 이러한 갈등이 깊어지고, 세대주의가 많은 갈래로 쪼개지면서 세대주의와 킹제임스 유일주의가 퇴조하면서 21세기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한국교계에 세대주의가 침투하게 된 것은 한국교회의 초창기부터다. 이는 1950년대에 접어들 때까지 말콤 펜윅 선교사의 단독 사역과 자립자생을 원칙으로 하다시피하여 성장해온 우리 침례교인들에게는 낯선 풍경인데,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 가운데 신학대학을 정규적으로 이수하고 건전한 신학을 가르친 선교사가 소수였고, 대다수 선교사들은 ‘성경학교’에서 어설프게 신학교육을 받았고, 가볍고 뜨거운 체험을 중심으로 한 엉성한 관념을 들고, 일제치하에 신음하는 한국땅에 들어와 민중들과 교회에 근본적인 처방을 고민하지 않고 세대주의 종말론이라고 하는 ‘마약’처럼 강력한 처방을 무분별하게 남발했다. 그 결과, 한국 장로교회가 세운, 따라서 한국 땅에 세워진 최초의 개신교 신학교인 소위 ‘평양신학교’ 조직신학 교수가 ‘무천년설’을 가르쳤지만 전국에 흩어져 사역하던 수십명의 미국 선교사들은 대략 10여개 정도의 ‘성경학원’ 출신들이었고, 20세기 초반에 맹위를 떨치던 세대주의를 신봉하던 자들이었다. 하지만 올바르게 신학을 이수하고, 바르게 성경을 가르친 이들의 사역 탓인지는 몰라도 한국교회의 세대주의는 깊게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따라서 위험도는 약했다. 한국교회 전반적으로는 세대주의에 취약한 상태였지만, 세대주의 종말론이 맹위를 떨치지 못했고, 다미선교회 같은 극단적 부류들이 ‘시한부 종말론’이라는 형태로 이단화하였을 때 홍역을 치른 정도였다.
다미선교회가 세간에 유명해진 사건이 1992년 10월 28일에 세상이 종말을 당할 것이고 성도들은 휴거할 것이라고 예언하여, 한국교계와 사회를 뒤흔들었지만 결국 사기사건으로 끝났다. 그런데 다미선교회의 핵심인물인 이장림이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라는 제목의 책을 1987년에 출간하여 한국교회와 세상을 시끄럽게 만든 직후인 1988년에 이송오가 ‘말씀보존학회’라는 이름으로 문서선교를 시작했다. 1990년에는 ‘한글킹제임스성경’(2005년판)의 모체인 신약성경 번역본을 ‘새성경’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했고, 1994년 4월 12일에 신약과 구약을 완역하여 출간하게 되었다. 성경책의 이름도 ‘새성경’에서 ‘한글킹제임스성경’으로 바꾸었고, 이후로 지금까지 약 65회의 개정판을 냈다.
세대주의에 기반을 두고, 다미선교회 활동을 한 이장림은 1992년 10월 28일에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며, 신자들은 휴거하고 불신자들과 유대인들은 7년 대환란을 겪을 것이라는 일종의 예언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는 자신의 예언활동을 1992년 10월 28일로 못 박은 셈이다. 그 날에 자신이 예언한 그대로 휴거를 하든 세상의 종말이 오지 않아 종교사기꾼으로 판명되든 그날 이후로는 세상에 얼굴을 내밀며 활동하지 못할 것이라고 못 박아놓은 셈이다.
반면에 이송오는 세대주의를 취하되, 시한부종말론에 휩싸인 분위기를 어느 정도 편승하되, 1960년대에 활동한 미국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 운동가인 피터 러크만의 사상을 도입하였고, 이를 성경 번역출판 사업으로 발전시켰다. 물론, 이 과정에서 한국교계와 커다란 마찰을 일으켰으나, 동조자들을 얻어 1992년에 ‘성경침례교회’라는 이름의 교회개척을 단행했다.
이송오가 개척한 이 교회가 현재 경기도 김포시 고촌에 위치한 ‘성경침례교회’이다.
우리 교단의 목사들도 종종 헷갈리는 명칭이 ‘성경침례교회’와 ‘성서침례교회’다. ‘성경’이라는 단어와 ‘성서’라는 단어가 한글로는 구별되지만 양쪽 명칭을 영어로 표기하면 똑같이 ‘Bible Baptist Church’이다. 교단/교파의 정체성을 ‘남침례교회가 성경적으로 불충실해져서 분리하여 독립한 침례교회’라는 식으로 설명하면, 그 나름 최소한의 사실성이 있다고 여겨지면서 양자를 헷갈리게 되고, 심지어 우리 교단의 성도들마저 침례교회의 올바른 정신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부류라고 착각하기 십상이다. 여기에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를 가미하면 웬만한 침례교인들은 깜빡 속는다.
성경침례교회는 1960년대에 미국에서 활동한 피터 S. 럭크만의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와 이를 1980년대 말에 국내에 소개한 이송오(말씀보존학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교회(들) 즉, 분파를 가리킨다. 이들은 90년 후반부터 주요 교단들이 ‘이단’으로 판정하였고, 교류와 참석을 금지시켰다. 반면에 성서침례교회는 19세기 후반부터 자유주의 신학이 미국 남침례교회에 침투하여 그 신학이 좌경화되는 것에 저항하던 프랭크 노리스(Frank Norris) 목사를 중심으로 한 보수적-성경유일주의적 목사들이 1950년대에 미국 남침례교회를 이탈하여 세운 교파다. 그 특징은 교회들의 연합을 ‘교단’(denomination)이라고 칭하기도, 교단화 되는 것도 반대하여 ‘친교회’(felowship)을 형성한다.
공식적인 입장 즉, 정체성을 천명하는 문장을 보면 “침례교회는 성경을 유일한 권위의 기준으로 삼으며, 성경의 무오와 성경해석의 자유, 신앙고백을 강조한다. 자원주의와, 전신자 제사장직 원리를 표방하며, 신앙의 자유와 교회와 국가의 분리(정교분리), 신자의 교회로서 회중정치를 표방한다.”로 되어 있다. 문장만 보면, 우리 교단의 정체성과 미국 남침례교회의 정체성과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차이점을 못 느끼는 이유는 자유주의를 반대할 뿐, 침례교인의 정체성을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서침례교회와 우리 교회들의 차이점은 남침례교회와 북침례교회의 차이점, 즉 문화적 차이점에 불과하다. 그런점에서 성서침례교회는 기본적으로는 우리와 자매지간, 혹은 사촌지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침례교회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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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오늘날에도 선민인가?
8월 4일자 뉴스레터 두 번째 글 "유대주의, 그 모순"이라는 글로 유대주의를 거부해야 마땅하다는 취지로 글을 올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두뇌에 각인된 "유대인의 우수성"은 하나님과 성경에 의해 보장되고, 하나님께서 부여한 특별한 위상 때문이며, 우리같은 이방인들은 유대인을 특별하게 대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관념을 "진리"처럼 떠받들 수 있는데, 이는 분명코 세뇌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에게 심어놓은 "세뇌"가 마치 진리 혹은 상식처럼 간주하여,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가스라이팅'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비유대인이든, 유대주의라는 거짓 관념에 길들여진 이들은 구약성경과 아브라함 언약을 근거로 하여, 오늘날에도 "특별한 지위를 가진, 축복된 백성, 선민"이라는 거짓된 사상을 붙들게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아브라함의 "후손", 아니, 정확하게는 아브라함 언약을 계승한 "야곱"의 자손들이 "선민"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언약이 어떤 특별한 종족의 성립과 발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메시아"의 오심과 "사역 즉,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그 중심에 있는 것이라면, 마태복음 1장이 선언하는 것처럼, 12지파의 육적 자손들 전체가 "메시아 혈통"의 선민이 아니라 "유다지파" 그 중에서도 "다윗의 자손"이 진정한 선민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1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족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아브라함에서 예수까지의 족보를 말하는 것이 족보가 보여주는 전부가 아닙니다. 메시아는 "유대인의 메시아"라는 것은 진리의 중요한 측면을 숨기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은 예언된 것을 성취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갈릴리로 옮겨서 성장하신 것 역시 예언의 성취를 위한 것입니다.
메시아는 유대인의 메시아일 뿐만 아니라 "이방의 메시아"라는 사실 또한 이사야의 예언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방의 갈릴리"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이 숨기는(?)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는, 그리고 우리가 복음서에서 읽으면서도 놓치는 매우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주변의 유대 땅에 사는 유대인들만 진짜 유대인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사마리인들을, 이론상 절반의 유대인이지만 실제로는 유대인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시 정통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북부의 "유대인들"을 사마리아 인들처럼 상종조차 하지 않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철저하지 못하고, 언제든 이방인들과 뒤섞일 위험을 마다하지 않는, 돈을 사랑하는 족속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로마 총독의 손에 넘겨주고 십자가에 죽이라고 간청하였기 때문에,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을 미워하고, 그 미움이 전통이 되었다고 설명하지만 이는 거짓입니다.
"베니스의 상인"이라는 소설에 등장하는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의 행실은 예수님이 탄생하기 수백년 전부터, 유대인들이 각처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고리대금업의 희생자는 언제나 가난하고 약한 자들입니다. 그들을 고리채로 착취하여 부자가 되면서도, 자신이 살고 있는 공동체에 "가진 자로서의 책무" 즉, 훗날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완전히 무시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종교로 인해 예외적 혜택을 받으면서도, 언제나 불평불만을 일삼고 폭력을 일삼고 폭동을 일으켜, 자신들이 사는 공동체 심지어 도시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짓을 서슴없이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 자신들끼리도 서로 분열하고 모함하고 폭력을 일삼았습니다.
그러한 유대주의를 벗어나 자신이 거주하게 된 도시 혹은 공동체에 융합하는 유대인들은 이방세계에 섞이게 되지만, 유대주의를 고집하면 골치아픈 별종인 데다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부를 장악하되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 가족의 안위와 권력을 위해 사용할 뿐인데, 누가 유대인들을 좋아하겠습니까?
만일 우리나라에 들어온 중국인들이 남한 각처의 금융과 상권을 장악하고 자기들만의 구역을 만들고, 자신들만의 별다른 세계를 구축하되, 오로지 중국의 영광만을 도모한다면, 한국 땅이 중국인들의 땅이 되고 한국이 중국에 종속되는 것만을 추구한다면 도대체 어떤 한국인들이 한국 땅에 자리를 잡은 중국인들을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노벨상을 가장 많이 받은 족속이 유대인들이라는 것도 노벨상을 받은 유대계 수상자의 숫자를 보고 하는 말인데, 여기에 일종의 속임수가 있는 것입니다. 노벨상은 종족 경연대회의 우승자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상식적으로, 노벨 평화상, 문학상을 제외한 진정한 의미의 노벨상 분야는 어떤 개인의 역량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속한 "나라"의 국력과 광범위한 학문적 역량, 연구역량, 실험역량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게다가 유대인 혈통이라는 것도 우스운 것입니다. 족보는 혈통을 보여주지만 4대가 지난 후손과 그 조상의 혈통관계도 사실상 남남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예수님 당시에 사마리안 인들은 이방인의 피가 섞였기에, 그 신앙의 순수성은 무시하고, 이방인의 "개" 취급하지 않았습니까? 이 기준을 놓고보면, 노벨상을 받은 유대인들 가운데 (적어도 신약성경 시대 기준으로) 순수 유대인 혈통은 얼마나 될까요?
이방인의 피가 섞인 유대인이 노벨상을 받았다면, 유대인의 피 때문에 노벨상 수상자가 된 것일까요? 이방인의 피 때문일까요? 유대인들이 부자이기 때문에 머리가 똑똑하여 "위대한 연구성과"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일까? 그들이 배우고 익힌 학문체계, 연구체계, 그 뒷받침을 마련한 그 나라와 학문공동체 또한 의미있는 밑바탕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행복할려면, 잘못된 관념, 거짓된 프레임이라는 족쇄를 깨뜨려야 합니다. 거짓 종교적 관념에 얽매이는 그것이 본질상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숭배에 빠진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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