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웨슬리안' 정확하게는 '웨슬리적 아르미니우스주의자'로 성장했고, 따라서 '반(反)'-칼빈주의자로 성장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꿈에도 몰랐다. 단지, 나는 정말이지 놀랍게도, 성경적인 그리고 성경만을 추구하는 성경적인 교회에서 성경적인 신앙을 몸에 익히고 배운 줄로만 알았다.
그 믿음은 조금도 틀린 것이 아니다. 나에게 믿음을 가르쳐준 신앙의 교사들, 목사들은 정말이지 성경을 그 있는 그대로, 거기에 써있는 그대로, 성경을 성경으로 풀면서 읽는 법을 가르쳤다. 그것도 상당히 체계적으로 가르쳤고, 수준 높게 가르쳤다. 이런 점에서 나는 정말이지 큰 복을 받았다. 정말이지, 비할 수 없이 큰 복이다.
훗날 돌이켜보면, 나는 내 믿음이 단지 성경과 성령으로부터만 온 것인 줄로 알았다. 이것만 생각하면, 그야말로 직통계시를 주장하는 꼴이다. 나에게 믿음을 가르치고, 성경을 설명해준 그 분도 스스로 깨우친 바도 있지만 누구로부터 배운 것과 누군가에 의해 다듬어진 "틀"이라는 것이 작동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나의 선생은, 그의 선생으로부터 배운 "믿음과 틀"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헌신과 은혜 그리고 반성적 고찰에 의해, 스스로 얼마나 개선했을까?
만일 내 선생이 자신의 선생으로부터 배운 바를, 그 "틀"을 깨치고 더욱 고결하게 발전시키지 못했다면 그 선생이 가르쳐주고, 제공해준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내게 전해주었을 것이다. 3세대에 해당할 수 있는 "내"가 멋모르고 배우고 익힌 그 "틀"을 면밀히 반성하고 발전시키지 못했다면, 나 역시 "3대에 걸친 고인물"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보수주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혹은 "복음주의란 무엇인가?"와 같은 의문을 갖게 되었고, 관련된 유명한 신학서적을 읽으면서 단지 그 지식만 습득하였더라면, 거기에서 멈추었더라면, 나는 오늘날까지도, 나아가서는 죽을 때까지도 윗 세대의 고인물을 그대로 답습하는, 똑같은 고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어떤 누구도 "웨슬리주의"를 작정하고 주입하지는 않았으나, 신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내가 웨슬리주의자의 '손'에서 믿음을 접하고 익히고 발전시키고 있는 중임을 알게 되었다. 그 다음 단계로는, 내가 배운 믿음은 결정적으로 "체계성"이 결핍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 체계성의 결핍은 "무모한 논리적 비약"을 수없이 범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한계를 발견한 것이다. 이 한계를 그대로 둔다면, 나는 선배들이 설정한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죽을 때까지, 그리고 그 한계 너머에 있는 또 다른 형제들을 미워하거나 무시해야 한다. 그들이 옳고 내가 틀렸더라도 모른 척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옳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틀렸다고 자기 세뇌를 하면서, 그 근거를 끊임없이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도 싫다면 옳고 그름의 경계선을 뭉개고 흐릿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내게 배움을 준 전통과, 상극의 전통을 어설프게합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냉정하게 살펴보고, 어디에서 차이가 발생했는지 그리고 그 원리의 차이를 고심하게 되었다. 그렇게 신학하기에 점점 빠져들었다.
그런데 종종, 이런 "신학하기"를 단연코 거절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신학하기에 몰입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편했을까? 성공하기가 얼마나 쉬웠을까? 그렇다. 정말 나의 인생과 목회생활은 정말 쉬웠을 것이다. 정말, 성공지상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신학은 지성적인 사람이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신학을 하면, 꾸준히 신학을 하면, 열심히 그리고 중단없이 신학을 하다보면, 싫든 좋든 지성적인 신앙인이 된다. 전혀 지적이지 않은 사람도 지적인 사람이 된다. "신학하기"란 합리적-지혜적 신앙이 되는 훈련과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학하기를 하지 않는다면, 반(反)-지성주의적 즉, 무지몽매한 신앙이 되는 길로 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믿음이 좋지만 신학자인 체하는 사람이 아닌, 평범하고 신실한 신앙인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신학없이 신앙생활을 영위하려는 사람은 "등기부등본"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으로 보고도 무엇을 봐야 하는지도 모르고 "부동산"을 사들이겠다고, 돈을 보따리로 싸들고 다니는 사람일 뿐이다.
돈이 무엇인지, 이자가 무엇인지, 화폐가 무엇인지, 주식이 무엇인지, 주식의 가격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주식투자"를 하겠다는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
사람들은 흔히, 투기는 나쁜 것이고 투자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경제학자들 혹은 경제학 교재에서는 "투기"와 "투자"를 구별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원리"를 모르고 "원리를 따르지 않고, 이해 못한 채" 투자를 하면 투기이다. 높은 수익을 얻기 위해 높은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을 '투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리스크"는 그 자체로는 "위험"(danger, crisis)가 아니다. 위험은 처음부터 그 자체로 위험한 것이지만 리스크는 일종의 "비용"이다. 원가를 절감할 수 있는 것처럼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 줄이면 된다.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기본적인 방법은 "공부"다. 목숨을 걸고 공부를 하면, 진짜 필요한 공부를 제대로 하면, 위험을 피하고 리스크를 줄일 길을 찾아낼 수 있게 된다. 그 길을 지혜롭게 밟아가면 성공한다. 그래서 정말 죽어라 하고, 목숨을 걸고 공부를 하는 주식투자자는 성공한다. 실패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에게서 "성공방법"만을 쏙빼내기를 원한다. 그 방법 그대로 따라하면 성공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실패한다. 패가망신한다.
신앙생활도 어쩌면 이런 식이다. 공부하지 않으면 실패한다. 이단에 빠지고, 패가망신하는 것으로 끝날, 그런 교회를 찾게 되고, 그런 교회에 열광하게 된다. 본인이 그렇게 되면, 본인에게서 그 비극이 끝나지 않는다. 그 비극은 악마의 굴레처럼 자식의 대로, 손자의 대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열왕기와 역대기, 4권의 책만 보아도 이 진리가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