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교회의 조건 : 좋은 신학, 살아있는 신학
신학을 공부한다고 하는 어떤 젊은이(?)가 교회를 통해 제게 연락을 해왔습니다. 1시간 가량 통화를 했는데, 대화의 후반부에 등장한, 아래에 소개한 질문 때문에 통화시간이 더 길어졌습니다. 청년은 제게, 만일 조직신학책을 단 한 권만 골라준다면 어떤 책을 골라주실 것인지를 제게 물었습니다. 진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때까지 답변했던 내용을 뒤집을 수도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이런 질문은 대답해주기가 몹시 힘든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질문자가 어떤 교파, 어떤 교단에 속하며, 어떤 모델의 신학자를 추종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장로교단이라고해서 모두 똑같거나, 모두에게 우호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여, 긴 시간에 걸친 제 설명과 답변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습니다.
첫째, 어지간히 좋다고 하는 조직신학 책들을 '단권'으로 압축한, 마치 백과사전과 같은 성격의 책을 골라야 한다면 아직도 루이스 벌코프가 쓴 조직신학 개론을 대체할 만한 책이 없다고 답했습니다. 일종의 가정용 의학백과사전을 구비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해주었습니다.
의학에 관한 지식을 집대성한 책을 구입하여 집에 비치해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펼쳐보며 의학에 관련된 의문을 해소함에 있어서 가장 잘 편성된 책이라는 뜻이죠.
둘째, 지식이 잘 정리된 책이 아니라 독자의 전인격 특히, 사고방식을 '신학도'로 전환시켜줄 '실전-훈련용' 책자를 원한다면 윌리엄 에임즈가 쓴 신학의 정수(Marrow of Theology)만한, 혹은 이 책을 대체할 수 있는 책이 없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윌리엄 에임즈(1576-1633) 혹은 라틴식으로 '아메시우스'(Amesius)를 장로교 쪽에서는 '청교도 회중주의자'(congregationalist)라는 이유로 홀대합니다. 그러나 네덜란드 개혁신학의 흐름을 살펴보면, 네덜란드 개혁신학은 에임즈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에임즈의 신학의 정수를 받아들인 세대와, 신학의 정수를 거부한 세대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윌리엄 에임즈가 대단히 탁월한 만큼, 에임즈와 그 사상을 밀어내기도 쉽지 않았겠지만 네덜란드 교회와 학계가 형성한 흐름을 외국인, 나그네가 막아내기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을 것입니다.
에임즈의 '회중주의 교회론'이 문제가 아닙니다. 에임즈의 책 '신학의 정수'는 신학을 공부하겠다고 입학한 학생을 진정한 '신학인'으로 전환시키고, 신학적 사고방식을 몸과 정신으로 익혀 소화시키도록 훈련시키는 책입니다. 그래서 신학의 정수는 그 접근방식 자체가 다른 어떤 조직신학 책과도 다릅니다.
에임스는 신학을 'living to God'으로 정의하였습니다. 삶을 다루는 것이 곧 신학이라는 의미입니다. 생명 그 자체만이 아니라 삶을 담은 그릇과, 삶과 삶을 이어주는 삶의 현장을 다룬다는 점에서 사회, 교회, 국가, 그리고 세계를 시야에 닮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훗날 네덜란드의 유명한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가 '삶의 체계로서의 신학'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에임즈는 살아있는 '믿음'을 바탕으로 삼아, 살아있는 '신학하기'를 체현하도록 하는 책입니다. 네덜란드에서 '도르트 총회'(1618-19)를 마친 뒤에 즉, 1620년대에 들어서서, 네덜란드 신학은 '사변' 즉 추상적 사유를 중시하는 쪽으로 치우칩니다. 그리고 신학적 안목 혹은 시야가 좁아집니다. 사변에 치우치고, 좁은 시야각으로 신학을 하면 신학은 그야말로 '상아탑'이 됩니다.
네덜란드 개혁신학은 사변화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1662년 대축출(Great Ejection)과 1689년 명예혁명을 통해, 학교 울타리 안에 '신학'을 가둬두고 '상아탑' 쌓기에 치중하도록 했다가 1729년에, 존 웨슬리가 '홀리 클럽'을 만들면서 치명적 타격을 입은 것이 앵글리칸(The Church of England)이라면, 그 100년 전에, 그 길로 간 것이 네덜란드 개혁교회였다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 때문에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국경선 너머의 독일에서 발전시킨 칸트철학과 '자유주의' 신학에 속절없이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사변화된 신학으로는 사변철학을 막지 못한다.
독일 칸트 철학과 자유주의의 진군에 대항하여, 옛 네덜란드 개혁신학의 전통을 되살리고자 하는 고군분투가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인 셈이죠. 그런데 전장에서 필요한 것은 군사학 교수의 탁월한 강의가 아닐 수 있습니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총탄, 포탄을 무릅쓰고 적병을 상대할 노련한 병사를 길러내지 않고는 현장에서 개혁주의를 구현할 수 없습니다. 참호에 머리를 처박은 채, 머리 위를 날아가는 소리를 듣고 포탄의 종류를 인식하는 지식보다는, 머리를 처들고 침착하게 적을 정조준하여 방아쇠를 당기는 훈련이 훨씬 더 본질적입니다.
강대상에 서있는 목사의 머릿속에 세계적 수준의 신학자가 인정해주는 신학체계가 '질서정연'하게 정리되어 있고, 그 지식을 논리정연하게 차근차근 풀어내는 목사가 있는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이런 류의 목사가 강조하는 교리, 신실한 삶이란 상아탑에 박제되어 전시된 "죽은 삶"에 불과합니다.
한국의 교육현실에서 자라나와, 신학교로 진학하고 학위를 추구한다면, 목회적 성공을 꿈꾸었다면 '박제된 지식'을 복사한 것이 목사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있을 뿐입니다. 이런 목사와 이런 목사를 좋아하는 교인들이 만들어낸 교회는 '박제된 지식' 속에 들어있는 '이상'을 목표로 할 뿐입니다.
참된 신학이 있어야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참된 신학은 살아있는 신학이지 않으면 안 되는데, 살아있는 신앙에서 자라나온 것이 살아있는 신학입니다. 살아있는, 참된 신앙은 '교인들의 삶', 그 삶의 현장에서 나오는 법입니다. 그 삶의 고뇌를 끌어안고 씨름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성경을 들고 그 삶 속으로 드어가서 씨름해야 합니다. 그래야 설교자의 머릿속에 있는 지식도 살아있는 지식으로 변화되는 법입니다.
사변적 신학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가난한 자의 삶을 가볍게 여깁니다. 가볍게 여기니 구체성이 떨어지고 그저 스쳐지나갈 뿐입니다. 가난한 자, 약한 자, 나아가서는 죄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 삶에 희망이 되고 그 삶을 변혁시키고자 하는 열정, 그 분투가 없는 신학은 죽은 신학입니다.
죽은 신학이 가득한 교회는 결코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시체썩는 냄새를 숨기려고 향을 가득 피우는 교회가 아니라
차라리 똥냄새가 가득한 교회가 죽은 교회보다는 좋은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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