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23]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
|
|
충분히 적당하게 성경적인 교회?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 하자고 말하면 모두가 옳다고 동의한다. 정말이지,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런데 성경이 가르치는 그대로 실천하다보면 반드시 서로의 이익이 상충하는 지점을 만난다. 모든 사람에게 손해가 되는 그런 것도 없고,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그런 것도 없다. 누군가가 웃으면 다른 누군가는 눈물을 흘린다. 누군가의 즐거움은 그만큼, 혹은 그 이상 다른 누군가의 피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경우는 결코 드물지 않다.
욕을 먹으면서도 뻔뻔하게 악을 행하는 데에는 그만큼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악인들이 단합하기 쉬운 것은 자기 몫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머리 좋은 악인은 그 악행을 변호할 구실을 잘 찾고, 왠만하면 정체를 들키지 않고, 들키더라도 절묘하게 법망을 빠져나간다. 머리 좋은 악인은 정말 머리가 좋은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 악인이 움켜쥔 이익을 나눠 먹을 생각에 적당히 눈을 감아주고, 편을 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보같아도 금방 배우는 법칙은 혼자 다 먹으면 죽는다는 것이다. 이익을 독점하면 반드시 죽는다는 법칙을 잘 알고, 이익을 최대한 골고루 배분한다. 그리고 자신은 적당히 먹는다. 그래서 가장 탁월한 처세훈 :
"과유불급(過猶不及)"
그래서 가장 어르스러운 경고: "적당히 해라!"
그런데, 성경적인 교회가 되는 데에 바로 이 교훈 "과유불급"이 통용될까? 성경적인 교회를 되라고 요구할 것도 없이 나만 잘하면 되고 너나 잘하면 될까? 고대(古代)로부터 즉, 초대교회 때부터 알려진 명구 가운데 하나는 "교회는 신자의 어머니"라는 표현이다. 이 말은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에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라는 말처럼, 한 사람의 신자가 만들어지는 데에는 교회 전체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교회는 신자의 어머니"라는 표현을 뒤집어 보면, 내가 신자다운 신자가 되고 싶다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야 한다는 문제를 별개로 하고) 나 자신의 결단과 헌신 그리고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신자다운 신자를 만들 줄 아는 교회가 없이는 거의 실현불가능한 꿈이라는 말이다.
신자다운 신자를 낳고 키울 줄 아는 교회
그런 교회가 성경적 교회이다.
그러나 성경적인 교회를 추구한다고 해서, 간절히 염원한다고 해서, 성경적인 교회인 것은 아니다. 목사가 성경을 잘 풀어준다고 해서 성경적인 교회가 아니다. "말씀이 있는 교회"라고 판단된다고 해서 정말 '말씀이 있는 교회'인 것도 아니다. 조직신학 책과 주석책에서 해당 구절에 대한 해설을 잘 요약하여, 교인들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는 설교는 필요충분조건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왜냐?
아무리 잘 가르쳐도 목사와 성도들이
그 교훈대로 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가르져진 교훈을 실천으로 옮기는 추동력이 있어야, 그 힘을 받아 실천하게 된다. 그 추동력을 얻는 가장 쉬운 방편은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다. 욕망을 적극적으로 자그가기 위한 적극적인 프로그램에 '간증'이라는 것이 있고, '부흥집회'(혹은 은사집회)라는 것이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상당히 효과적이다.
보험회사의 기본적인 영업방식으로도 활용된다. 마케팅 회사의 기획력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런 원초적인 자극을 얼마나 탁월하게, 얼마나 기술적으로 포장하느냐에 달려있다. '입소문'이라는 것도 실은 그 속에 입소문을 통해 욕망을 연쇄적으로 자극하여 사람들을 끌어들여 영업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책략이다.
"성경적," "성경적 신앙," "성경적 교회" 이런 말을 활용하여 "교회 마케팅"을 행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식으로 청교도를 강조하는 경우, 개혁주의 신학을 강조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까 여기에도 진짜가 있고, 가짜가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차이가 날까? 어디를 보면, 진짜 성경적인 교회인지 "성경적"이라는 마케팅을 행하는 교회인지를 알 수 있을까? 실은, 간단하다.
"성경적" 즉 성경의 가르침대로 행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느냐?
얼마나 손해를 감수하느냐?
손해를 기꺼이 감당하는 것, 오히려 손해보는 것을 기뻐하는 것은 죄로 물든 욕망 특히, 이기심을 죽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기심을 죽인 사람만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길을 선택한다. 이기심을 죽인 사람만이 자기를 부인할 수 있다.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것,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 뇌물을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음으로써 빈부귀천을 떠나 공평하게 판결하는 것, 억울한 자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며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은 선한 일도 적당히 하면 된다는 태도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경지다.
열정은 숨기지 못한다.
열정은 외침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는다. 굳이 자신을 알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럴 시간도 아까워한다. 열정은 그 자체로 자기 존재를 입증한다. 만일 열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거기에는 열정이 없는 것이다. 열정은 적당한 타협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열정이 사그러들어 꺼져버린다.
"성경적"이 되고자 하는 함에, 뜨거운 열정이 없는 교회는 결코 좋은 교회가 아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을 이리저리 저울질 하는 교회는 열정이 없는 교회다. 철저하게 실행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이뤄내고자 하는, 그리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열정이 진짜 열정이다. 이런 열정이 있는 교회가 진짜 교회다.
이런 열정이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이거나 죽어가는 교회다.
|
|
|
성경이 '가난한 자'를 돌보라고 말한다
성경이 언급하는 '가난한 사람'은 크게 보면, 우리가 돌보아야 할 대상자들을 가리키는 '가난한 자'와, 우리 자신이 되어야할 모습인 '가난한 자' 이렇게 두 가지 종류다. 단순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두 가지 종류의 표현에서 '가난'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는 지는 매우 분명하다.
학자의 논문이 아닌 한, 이 '가난'이라는 단어에 '영적'(in Spirit)이나 '심령' 혹은 '마음'이라는 단서를 굳이 달 필요가 없다. 실천적 측면에서 그러한 단서는, 성경 그대로 행하고 싶지 않고 적당히 자기 손해가 없는 만큼 실천하거나, 실천적 가난이 왜 불가능한지를 다른 사람에게 설득하고자 하는 욕구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가난'은 학자의 연구 대상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가난'은 삶의 한 부분처럼, 숙명처럼, 형벌처럼 달라붙어 있다.
'가난'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태어날 때부터 "풍요로움"과 "부유함"에 둘러싸여 평생을 사는 사람은 없다. 가난이 무엇인지, 배고픔이 무엇인지, 가난한 사람들이 존재하는지 하나도 모른 채 뚱딴지같은 소리를 했다는 프랑스 왕비 앙뜨와네뜨에 대한 썰도 실은 프랑스 왕과 왕비를 단두대에서 처형하기 위해 만들어낸 거짓말이다. 오히려 앙뜨와네뜨의 어머니는 매우 검소하게 살면서 딸을 잘 교육시켰다. 그그렇게 교육받은 딸은 프랑스 왕비가 되었으나 정말 검소하게 살았고, 가난한 이들을 깊이 동정하였고 기회가 닿는대로 자신의 재물을 내놓아 도움을 줬다.
프랑스 국가재정의 파탄은 국왕과 왕비의 사치와 방탕 때문이 전혀 아니었다. 가장 큰 원인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어진 미국의 독립전쟁에서, 영국에 대항하는 식민지인들의 전비를 뒷받침해주는 것에 있었다. 미국의 승리와 독립에 프랑스가 가장 큰 희생을 치렀으나 프랑스가 얻는 것은 막대한 재정손실 뿐이었다.
가난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세상에서 가장 큰 부를 거머쥔 사람도 가난에서 멀리 떨어진 삶을 추구할지라도 가난의 존재와 위력을 모른 척할 뿐이다. 가난에 대해 잘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것은 목사도 기독교인도 마찬가지다. 성경 본문이 무슨 특별한 비밀을 숨겨놓은 것마냥 갱도 깊숙한 곳에서 금광을 발굴하듯이 주석책을 뒤진다.
아무리 깊은 갱도를 파내려가더라도 가장 기본적인 장비는 곡괭이와 삽인 것처럼 성경에서 진리를 파내는 가장 기본적인 장비는 '상식'이다. 고도의 신학을 함에 있어서 천재적인 재능이 가장 기본적인 토대가 아니다. 천재적인 재능이 아니라 '상식'이다.
'가난'이란 필요한 것이 결핍된 상태를 가리킨다. 성경이 요구하는 '거룩한 삶'이란 신비롭고 신령한 삶이 아니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는 삶' 즉 nearer to God 혹은 living to God은 '사치하지 않는 삶'이며 '가난한 자를 돌보는 삶'을 토대로 한다. 외로운 자에게 친구가 되어 주고, 버림받은 자와 함께 할 줄 아는 삶을 버리고서는 이뤄질 수 없는 것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거룩한 삶이다.
종교개혁의 본질을 알고 싶어서 루터와 칼빈이 남긴 유명한 '저서'를 붙들고 씨름하는 사람들, 교리에 대한 고도의 학문적 통찰을 추구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교회개혁의 발걸음 속에는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 즉, 인간다운 삶을 지탱하기 어려운 사람들, 버림받음과 비참함과 억울함을 억지로 견뎌가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돌봄이 있었다.
광장으로 뛰쳐나와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는 사람들을, 온갖 꼬투리를 잡으며 손가락질을 하며 멀리 쫓아버릴 때, 가난한 자들을 외면할 때 교회는 타락했다. 가난한 자들, 힘없는 자들, 버림받은 자들을 위하여 교회가 목소리를 높이고, 자신의 소유를 팔아 나눠줄 때 교회는 흥했다. 그럴 때 교회는 강력한 리더십을 갖게 되었고 세상을 변혁시켰다.
루터가 가난한 자들이 내민 손을 외면했을 때, 루터가 받는 봉급은 2배로 올랐지만 루터를 중심으로 추동되었던 독일 작센 종교개혁은 사실상 끝났다. 루터가 남긴 막대한 유산도 진정한 유산이 되지 못했고 루터의 아내는 집에서 편안하게 죽지도 못했다.
프라하 대학의 총장의 지위에서 촌구석으로 쫓겨난 얀 후스가 가난한 자들의 삶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어가 가난한 자들의 언어를 익히고 가난한 자들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그들의 언어로 예배를 드렸다. 그래서 산 채로 화형을 당해 죽었다. 그러나 얀 후스의 죽음은 보헤미아 전역을 개혁의 불길로 뒤덮게 만들었다.
얀 후스가 갔던 길은 잉글랜드에서는 위클리프가 간 길이다. 얀 후스는 위클리프로부터 배운 바가 많았다. 위클리프는 '영어'(잉글랜드 어)라는 천민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위해 영어성경 번역을 시작했다. 탁월한 사제가 되어, 국왕의 존경을 받고 귀족의 반열에 서서 우아한 라틴어를 구사하는 길이 아니라 천민들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넘치도록, 그리하여 고귀하고 복된 삶을 영위하도록 하기 위해 자기 삶을 희생하고 생명을 걸었다.
그것이 다윗이 갔던 길이고, 다윗이 후계자 솔로몬에게 가라고 권면했던 길이다. 혹자는, 다윗이 몇 가지 실책을 빼면 항상 좋은 믿음을 견지했다고 가르친다. 범죄를 했더라도 하나님 앞에 엎드려 철저히 회개하여 죄 사람을 받은 사람이라고 가르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좀 더 선명하게 들여다보면, 좀 더 뚜렷하게 보이는 디테일한 선들이 보인다.
다윗은 강력한 왕권에도 불구하고, 왕으로서 이룩한 대단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땅에 속한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았다. 잘못을 저질렀다는 깨달음이 있었을 때, 죄를 범했다는 지적을 받았을 때, 그 어떤 것도 잃어버릴까봐 빼앗길까봐 아쉬워했던 것이 없이 다 내려놓았다. 그러한 회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는 골리앗을 죽여 그 모욕과 수치를 씻겠다는 소년 다윗의 위치로 다윗을 되돌려놓았다. 아둘람 굴에서 가난한 자들, 오갈 데 업는 자들을 온갖 수치를 무릅쓰고 돌보던 그 시절의 다윗을 잊지 않게 만들었다. |
|
|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왜 할까?
나는 교회를 다니면, 당연히 성경공부를 해야 하는 줄로 알았다. 신학교에 입하기도 전에 성경공부에 대한 훈련과 확신이 꽤나 있었다. 당시에, 성경공부의 수준을 높이려고 애를 쓴 교회가 그리 흔치 않았던 때였다. 신학교에 진학해서는 요한계시록 세미나를 좇아다니며 열심히 받아썼다. 그러다가 고 하용조 목사님이 연예인교회 사역을 그만 두고, 잠시(?) 여유로운 틈에 이화여자대학교 앞 대동빌딩에서 '두란노서원'을 개원하고 성경공부를 시작하자 어찌어찌 소문을 듣고 찾아가 단골 청강생이 되었다. 데니스 레인 강해설교 세미나는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그러나 지금은 온갖 성경공부 방법론과 교재를 섭렵하다가 지친 듯... 성경공부에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이 생겼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성공공부"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화된 성경공부"를 혐오하게 되었다.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한국교회의 가장 심각한 병폐 가운데 하나는 '성경공부 과잉'이다. 성경공부를 교회성장, 교회 대형화, 헌금수입 극대화를 위한 '도구'로 전락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다운 삶을 위한 '공부,' 참된 성장을 위한 자양분 공급 같은 목적과는 전적으로 동떠어진, 완벽하게 이질적인, 오로지 목사 혹은 일부 주류 세력이 지배권을 장악한 '교회'라는 조직체의 양적 팽창과 교인길들이기를 위한 수단에 불과한, 한낱 도구로 하나님의 말씀을 끌어내렸다.
주석성경이라는 것도 신학적으로 문제가 많다. 물론, 다년간의 노력을 기울여 그 문제를 줄인 주석성경도 있다. 개혁주의적, 건전한 주석들을 편집한 좋은 주석성경도 있다. 주석성경으로 가장 유명했던 것이 잉글랜드 청교도들이 제네바로 피난가서 만들었던 '제네바 성경'이다. 하지만 앵글리칸(국교회) 사제들의 헛소리를 들어야만 했던 잉글랜드 본국의 신자들을 위해 만들었던 것이다. 제네바 성경의 대성공으로 말미암아 앵글리칸 사제들은 국력을 기울이다시피하여, 최상의 영어성경을 만들기로 작정했고, 그동안 탄압했던 성경번역가들과 영어번역성경들을 대거 기용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1611년 KJV이다. 국왕 제임스 1세가 잘났기 때문에 KJV이 좋은 영어성경인 것이 아니다.
그 다음에 유명한 주석성경이 저 유명한 '스코필드 성경'이다. 스코필드 성경에 실린 해설 혹은 주석이 세대주의적이었기에, 스코필드 성경의 성공은 곧 세대주의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스코필드 성경의 주석이 대단히 문제가 많았고 그 자체로도 모순이 많았지만 그 엄청난 성공은 많은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었다. 너도 나도 주석성경을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스코필드 주석성경으로 인해, 성경을 쫌 아는 사람들이 양산되기 시작했다. 얄팍하고 모순된 잡지식(?)이 지식의 왕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그 위에 부흥운동의 열기가 미국 전역을 휩쓸면서, 종교의 판을 갈아엎었다. 경박한 성경공부가 무겁고 둔한 신학공부를 밀어냈다. 마치 농부들의 손에 들린 보잘 것 없는 낫이 철갑으로 중무장한 중세의 기사를 꼬꾸라뜨리듯이, 그리하여 가난한 농부들이 천하무적의 스위스 용병단이 된 것마냥 주석성경과 그 성경공부가 교계를 휩쓸었다.
당연하게도, 가난을 고질병처럼 안고 살았던 스위스 시골농부들의 삶은
유럽에서도 손에 꼽히는 부자들의 살림살이가 되었듯이 주석성경과 부흥집회는 상업적 성공의 가능성을 열어줬다. 정말이지, 미국은 기회의 땅이 맞다.
여기에서 미국 문화의 특기가 발휘되었다. 주석성경은 상업적 성공의 기초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성경공부는 프로그램화되었다. 상업적 성공, 대중적 성공은 성공 포인트를 찾아 그 지점을 강화한다.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덤벼들면, 성공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성공을 지속화하기 위해, 중독성을 강화시킨다.
성경공부를 체계화하지 않으면 마치 성경을 모른다는 느낌을 갖게 되고, 성공공부를 규칙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심이 안 되고, 한 단계를 마치면 기필코 다음 단계에 도전해야 되고,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익힌 사람들을 수준 높은 사람으로 인정하게 되는 그 자연스러움이 중독 증상이라는 것을 모른채 뺑뺑이를 돌게 된다.
뺑뺑이를 도는 중독자가 많고, 뺑뺑이를 돌다가 목사가 된 사람이 많으니 목사의 할 일이란 교인들을 뺑뺑이 돌리는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뺑뺑이를 돌다가 어지러움을 느끼면 잠깐이라도 멈추고 제정신을 차리면 될 텐데 도무지 멈추지를 못한다. 두려움 때문이다. 경쟁에 뒤쳐지는 것 또한 두려운 것이다. 게으르고 태만하다는 낙인 또한 두렵다. 부자가 못되면 가난해질 것이라는 두려움과 뭐가 다를까?
그 두려움은 욕망의 표출이 아니고 뭐겠는가?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자랑하는 교회,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치밀하게 운용하는 교회, 이런 교회가 좋은 교회가 될 가능성은 정말 낮다. 교회는 프로그램에 정통한 사람을 만드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는 곳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손길로 만들어진다. 프로그램에 중독된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중독되면 망상이 커질 뿐이다.
|
|
|
|
좋아요, 구독, 그리고 가입을 눌러주시고 물심양면의 후원은
동영상 제작과 미디어 선교활성화에 큰 도움이 됩니다.
질문 혹은 의견을 아래 이메일 주소로 보내주시면, 성심을 다해 반영하겠습니다.
All Rights reserved
본 메일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 유포하는 것을 허락합니다. 발췌하여 다른 미디어에 포함시키거나 전제하는 것은 저작권자로부터 별도의, 명백한 허락을 받아야 하고, 허락 받은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
|
|
|